[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안내]
총 69화로 완결된 장편소설입니다.
사건 이후, 끝나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는 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차창에 피어난 얼음꽃 밑으로 백색 차선이 지나간다. 끊어지지 않는 그 움직임은 마치 거대한 구렁이 같다. 반대편 차도에서 다가오는 차는 쉭 소리를 내며 등 뒤로 사라진다. 뒷좌석에 앉아 담요를 덮고 있는 예림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풍경을 바라본다. 얼어붙은 산속의 나무들이 눈꽃으로 치장한 군중처럼 보인다. 함박눈은 흩날리는 봄철의 매화처럼 창유리에 내려앉는다. 그 정교하고도 아름다운 소재(素材)가 결합되어 빛나는 정원을 이룬다.
아빠는 일정한 간격으로 핸들을 움직이고, 앞서 두 시간을 운전했던 엄마는 이따금 아빠에게 말을 건다. 예림은 룸미러에 비친 아빠와 눈을 맞추며 상상한다. 지친 부모님을 위해 대신 운전대를 잡는 자기 모습을. 상상 속 승용차는 속수무책으로 곤두박질친다. 귓전에 아른거리는 폭음을 듣고 있자니 긴 하품이 나온다. 예림을 따라 엄마 아빠도 하품을 한다. 셋은 동시에 작게 웃는다.
졸리면 자도 돼. 도착하면 깨워 줄 테니.
예림의 눈이 서서히 감긴다. 의식은 반대편 차도로 미끄러진다. 차체는 싫증난 아이가 내팽개친 값싼 장난감처럼 찌그러진다. 창유리가 산산조각이 난다. 어둠은 예림이 깨어있었다면 질렀을지도 모르는, 만일의 비명마저 집어삼킨다.
예림은 눈을 뜬다. 휘발유 냄새가 코를 찌른다. 울면서 담요를 걷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차 문을 연다. 난생처음 겪는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눈밭 위로 쓰러지는 일 말고는 어쩔 도리가 없다. 정수리에 소복이 쌓인 유리 파편과 얼굴을 적시던 피가 눈 속으로 스며든다.
백일하에 드러난 이 사건을 무료한 군중이 놓칠 리 없다. 자동차 주변으로 나무들이 모여든다. 예림은 그들의 웅성거림을 듣는다. 눈 속에 파묻힌 육체가 탁자 끄트머리에 놓인 스노우볼 같다. 군중의 경악과 분노 그리고 멸시가 탁자를 뒤집는다. 동그란 유리 속, 쌓여있던 눈송이가 다시금 흩날린다. 예림은 스노우 엔젤을 만드는 것처럼 두 팔을 움직인다. 금빛으로 물든 눈을 한가득 움켜쥔다. 얼어붙은 공간 속에서 허공에 대고 말한다. 커다란 눈송이를 내려 가족의 죄를 덮어 달라고 기도한다. 저 검푸른 침엽수들을 모조리 잠재워 달라고 속삭인다. 겨울 산이 자비로운 손길로 예림을 감싸 안는다.
예림은 고통과 배신을 잊는다. 수치심을 잊는다. 호흡하는 법을 잊는다. 마침내 시간을 잊는다. 그는 시리도록 아린 이 감각이 죽음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확신은 곧이어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아집으로 변한다. 영원히 녹지 않을 얼음 속에서 세 사람은 절대 썩지 않으리라.
그러나 눈은 어김없이 떠진다.
서늘한 병실엔 예림과 고모뿐이다. 수명이 꺼져가는 전등이 눈을 깜빡인다. 그 단조로운 리듬 속에서 고모는 예림을 내려다본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예림이 어물거린다. 인제 그만 깨우세요. 계속 자게 해줘요. 고모는 코웃음을 친다. 으레 아빠를 비웃곤 했던 얼굴이다. 고모가 호흡기를 잡아 뜯어버리고 주삿바늘을 모조리 뽑기 시작한다. 그만, 그만해요. 제발 자게 내버려두라고요. 예림의 움츠린 어깨를 끌어당기며 고모가 소리친다. 장례는 끝났어.
자, 이게 네 현실이다.
예림은 소스라치며 깨어났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예림을 향했다. 교사가 보건실에 예림을 데려다 줄 사람으로 반장을 지목했다. 예림은 혼자 다녀올 수 있다며 한사코 거절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교실을 나갈 때까지 수업은 이어지지 않았다. 복도로 나온 예림은 이마의 땀을 훔쳐내었다. 실체인지 환각인지 모를 선혈이 양손을 적셨다. 예림은 잠자코 서서 심호흡했다. 손을 적시는 것이 피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교사들이 수업 진도를 나가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어떤 교실에선 일제히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터졌다가 곧 가라앉았다. 그날의 사고로 시작하여 고모의 일침으로 끝나는 악몽. 예림은 현실과 환상의 괴리를 풀지 못한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여전히 자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닫자 소름이 끼쳤다.
‘졸리면 자도 돼.’
엄마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히터를 튼 승용차 안, 담요를 덮은 채 단잠에 취한 자신을 엄마가 깨운다. 지루한 여정엔 끝이 존재했고, 그 끝은 집이었다.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었다. 고모가 현실이라 칭하는 이곳에서 살아야 했고, 고모를 견뎌야 했다. 예림은 두 손을 치마에 문지르고 복도를 따라 걸었다. 억지로 끌려온 전시장의 그림을 무심히 보듯 교실 창문들을 지나갔다. 칠판에 공식을 적는 해운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금 그와 눈이 마주친다면 자신과 해운 둘 중 하나는 꿈에서 깨어나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예림은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갔다.
방과 후 예림은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나희를 기다렸다. 문득 나희네 에어컨 생각이 났지만 이내 그의 집에 따라가지 않은 편이 나은 선택이라고 마음을 고쳤다. 딸의 친구를 떠돌이 개처럼 여기는 나희 어머니를 마주 하자니, 차라리 오후의 뙤약볕이 나았다. 예림은 가방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냈다. 아빠의 유품이었다. 며칠 전 지수열의 라이터를 아빠의 유품으로 착각했던 일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예림은 고등학교 입학식 때부터 교복 재킷에 유품을 넣고 다녔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눈을 잔뜩 쥐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는데, 그 순간마다 위안을 받곤 했다. 예림은 여전히 겨울이 좋았다. 얇은 하복에 라이터를 넣고 다닐 배짱은 없었으니까. 예림은 라이터에 음각된 아빠의 이니셜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지난겨울은 꿈과 현실의 거리가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던 계절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친척 어른들의 동정심만은 단번에 현실로 분류할 수 있었다. 평소 자신을 건방지고 제멋대로라며 손가락질하던 그들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예림은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었다. 어른들의 관심엔 이제 신물이 났다.
줄곧 그네를 타고 있던 아이가 그네에서 내렸다. 응달 밑 벤치에 자리를 잡았을 때부터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아이였다. 예림은 눈을 내리깔았다. 아이가 이쪽으로 오지 않기를 바랐으나 아이는 영락없이 다가왔다. 예림은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살폈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고, 환절기 때나 어울릴 잠옷을 입고 있었다. 주변에 신경 써주는 어른이 없는 걸까?
“언니.”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예림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언니네 엄마 아빠는 아직도 싸우고 있어.”
아이가 입을 벌려 소리 없이 웃었다. 볕은 뜨거웠고, 땀이 식은 몸은 사늘했다. 동네 아이들이 깔깔대며 뛰어다녔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며 소리를 질렀고 회전무대에 올라타 쿵쿵 발을 굴렀다. 한낮의 사물들은 온전히 자리에 존재했고, 아이들의 얼굴엔 그늘 한 점 없었다. 문득 예림은 아이가 입고 있던 잠옷이 자신이 어릴 때 입었던 것과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림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이의 얼굴을 다시 확인하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러나 손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눈도 감기지 않았다. 아이는 찢어질 듯 입을 크게 벌리고 비명을 지르는 시늉을 했다. 예림은 나희가 와서 몸을 흔들 때까지 그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아야만 했다. 아이인지 귀신인지 모를 존재가 고른 어린 시절 얼굴이 역겨웠다.
“괜찮니? 병원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냐?”
나희가 건넨 물통을 단숨에 비우고 예림은 고개를 저었다. 놀이터엔 자신과 나희 외엔 아무도 없었다. 저 혼자 흔들리는 그네를 보니 소름이 끼쳤다.
‘전부 당신 때문에...’
그 썰렁한 집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고모는 단 한 번도 부모님 얘기를 꺼내지 않았었다. 그건 마치 고모의 배려를 받고 있다는 착각까지 들 정도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날 아침은 달랐을까. 예림은 손바닥으로 두 뺨을 찰싹 때렸다. 고모의 조심스러운 눈빛과 경직된 표정이 뇌리에 떠오르는 게 못내 끔찍했다. 나희의 한숨 소리가 들리자 예림은 급히 아무 변명이나 길게 늘어놓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른들이 말했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다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고 지금도 흐르지 않았다. 예림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여행자 같은 몸짓으로 모래밭에 떨어진 유품을 주웠다. 여전히 자신은 승용차 뒷좌석에서 깨어나지 못한 게 아닐까. 고모의 집에서 신세 지며 학교에 다니는 불유쾌한 꿈을 꾸는 중일지도 몰랐다. 그 누가 아니라고, 네가 그저 미쳤을 뿐이라고 매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