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안내]
총 69화로 완결된 장편소설입니다.
사건 이후, 끝나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는 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송예림, 너 오늘 청소 당번이라며.”
“누가 대신 해준다고 가라는데?”
“저번에 네가 말한 애니? 아니면 다른 애니.”
“몰라.”
“내가 언제 전교생 이름 다 외우라고 했니. 최소한 너희 반 애들 이름은 알아둬야 하지 않겠니.”
“알았어. 알았어.”
“송예림, 제발 내 말 제대로 들어줄래? 그 애들이나 선배들이 아무 이유 없이 그러겠니? 무조건 의심부터 하고 보라니까? …의심하는 게 찝찝하다면 최소한 사심 품고 접근하는 인간들 얼굴이라도 제발 구분 좀 하자.”
“알았다니까.”
예림은 나희의 학원 교재와 참고서로 묵직한 에코백을 대신 들어주며 웃어넘겼다. 나희가 다소 비뚤어진 심사로 세상을 본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와 굳이 피곤한 대화를 이어가고 싶진 않았다. 나희의 충고는 일견 맞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친척 집에 얹혀사는 일이 상당히 고통스러웠기에 학교생활만큼은 편히 누리고 싶었다. 때마침 모두 멋대로 다가왔고, 멋대로 부드러웠고, 멋대로 다정했다.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일만큼 쉬운 일은 없었다. 그래, 얼마든지 날 바보 취급해. 예림은 사뿐한 걸음걸이로 나희를 앞질렀다. 출입구를 열자마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기침이 터져 나왔다. 가끔 선생님들이 주차 구역에서 흡연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1학년 남자애들마저 공공연히 이곳을 이용하는 줄은 미처 몰랐다.
‘가자, 얼른 가자.’ 나희가 입 모양으로 말하며 끌어당겼다. 이젠 문을 열 때도 길바닥에 개똥이 있을지 없을지 미리 ‘의심’부터 해야 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질 나쁜 남자애들을 일부러 자극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기에, 예림은 나희의 뒤를 얌전히 따라가려 했다. 그때 작은 금속성의 물체가 바닥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발치에 지포 라이터가 보였다. 예림은 나희의 손을 놓고 급히 라이터를 주웠다. 에코백 끈이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바람에 얇은 부록 책자가 삐져나왔다. 라이터를 넣으려고 가방을 열자, 패거리 중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너 뭐냐? 바닥에 떨어지기만 하면 다 네 거냐?”
그렇게 증오에 찬 목소리로 말을 거는 남자애는 처음이었다.
“예림아, 너 뭐 하는 거야?”
나희가 창백한 얼굴로 추궁했다.
그제야 예림은 손을 폈다. 말벌 한 마리가 손바닥에 놓여있었다. 예림은 화들짝 놀라 지포라이터를 화단에 내팽개쳤다. 나희의 얼굴은 그야말로 죽상이 되었다.
“아, 미안. 정말 미안. 내 친구가 지금 아파서,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래.”
“시끄러우니까 입 닥치시지? 야 너, 귀먹었어? 안 움직여?”
예림은 라이터 주인을 빠르게 살폈다. 키는 자신과 비슷했고 덩치도 큰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눈빛이 너무나 싸늘해서 소름이 돋았다. 만일을 대비해 라이터 주인을 비롯한 소년들의 가슴께를 훑었다. 명찰을 찬 놈은 아무도 없었다. 예림은 마른침을 삼키고 화단 속으로 들어갔다. 라이터가 자기 건 줄 알았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예림의 학교생활은 개판이 될 터였다. 다행히 라이터는 금방 찾았다. 이제 보니 말벌이 양각된 라이터였다. 예림은 화단에서 나올 때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곧 터져 나올 저들의 웃음소리를 상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라이터 주인을 비롯한 이 패거리는 잠잠했다. 뚫어져라 응시하며 담배 연기만 내뿜을 뿐이었다. 아침엔 고모, 점심엔 음침한 여자애, 초저녁엔 이런 개똥밭이라니! 예림은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부으며 소년들의 시선을 뚫고 주인에게 물건을 돌려주었다.
“…미안해.”
그제야 라이터 주인은 씩 웃어 보였다. 자신을 노려보는 눈빛은 달라지지 않아서 예림은 겁을 먹은 티를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라이터 주인은 예림과 나희에게 가도 좋다고 손짓했다. 두 소녀가 열 걸음 정도 떼었을 무렵 뒤에서 라이터 주인이 지껄였다.
“야, 근데 너, 좀 봐줄 만하다?”
저 말을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가면 어떻게 될진 뻔했다. 예림은 이런 압박을 받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자신을 자찬하며 라이터 주인을 향해 고맙다고 말했다.
저 앤 대체 누구지? 예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라이터 주인 발밑에 줄곧 엎드려 있던 남자애의 등을 마음에 담아두었다. 언뜻 봐도 라이터 주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덩치가 큰 남자애였다. 예림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빤히 관찰하던 저 막된 녀석들과 똑같아지고 싶지 않았다.
두 소녀는 부리나케 교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횡단보도 앞에서 나희가 예림의 볼을 무자비하게 잡아당겼다.
“송예림, 너 대체 왜 그랬니! 아까 그 녀석 누군지 몰라?”
“걔가 대체 누군데?”
“지수열! 제발 걔는 기억해 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