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화. 예림은 도망칠 곳이 없다

[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by 선명

[안내]

총 69화로 완결된 장편소설입니다.

사건 이후, 끝나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는 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건 절대로 자기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예림은 그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의 맞은편에 앉아 식빵 껍질을 벗겼다. 그 사람은 고모였고 한창 여름 방학 일정으로 딸과 입씨름을 하는 중이었다.

“아직 고등학생도 아닌데, 방학 내내 학원 뺑뺑이는 너무 하잖아!”

아미는 아침 8시 15분에 나가 자정이 되기 직전에 귀가했다. 아미가 미치려고 하는 게 십분 이해가 갔다. 예림은 휴대폰을 들고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이제 막 집에서 나왔다는 해운의 문자가 와 있었다. 사소하고 별다른 내용이 없는 문자였지만 그래서 더 웃음이 나왔다. 빠른 속도로 답장을 보내고 우유를 들이켰다. 예림은 남은 토스트를 한입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집에 사는 사촌 동생이 고초를 겪는 건 가슴이 아팠으나 결국 남의 일이었다.

“너희 학교도 방학 때 보충수업이 있다는 소식 들었다. 이 기회에 공부 좀 했으면 하는데, 어떠니?”

예림은 도로 자리에 앉지도, 못 들은 척 부엌을 나가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빵 조각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아침부터 이런 잔소리가 유쾌하진 않겠지만, 네가 받아온 성적을 보고 좀 놀랐어야 말이지.”


내가 어쩌다 저 사람에게 이런 말까지 듣고 있는 걸까?


고모의 집에서 지낸 지 벌써 반년이 흘렀다. 여전히 그 생활이 현실감이 없는 건 고모와 똑 닮은 자신의 생김새도 한몫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과 고모를 모녀간이라고 단정 지을 정도였다. 분명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데도, 그런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예림은 약간 혼란스러웠다.

“2학기부터 야자는 할 계획이었는데요….”

“그래? 하긴, 오빠나 새언니나 네 교육엔 통 관심이 없어 보였지. 그래서 네가 이렇게 위기감이 없는 걸까.”

고모가 부모님의 험담을 하는데도 화가 나지 않았다. 아니, 화를 낼 수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은 화를 낼 자격이 없었다.

“올해 추석연휴에 넌 딱히 할 일이 없어. 그렇지?”

예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추석이라니, 벌써부터 안절부절못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명절부터 작년 추석까지 가능하다면 그 기억을 전부 도려내고 싶었다. 그래야 벌을 달게 받을 맷집이 생기지 않을까.

“그런데 이제부터 새 일정이 생기겠구나.”


예림은 다음에 올 말을 기다렸다. 고모는 말없이 반응을 살필 뿐이었다. 또 시작이었다. 내가 그 잘나신 의중을 헤아리기 전에 그냥 속 시원히 말해주면 얼마나 좋아? 염증을 느끼며 예림이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고모와 제가 같이 엄마 아빠를 보러 가야한다는 건가요?”

필요 이상으로 날을 세우기 싫었다. 그러면 지는 기분이 드니까. 그러나 예림은 능청스럽게 굴 만큼 단단한 아이가 아니었다.

“너 혼자 보낼 수는 없잖니?”

유난히 오늘 아침이 현실감이 없고, 해운의 문자가 유독 반가운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난데없는 시련에 예림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고모는 미쳤다고, 부모님은 고모를 절대 반겨주지 않을 거라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예림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식탁에 놓인 고모의 손끝이 떨리는 게 보이자, 맥이 탁 풀렸다. 아무리 반발하고 싶어도, 지금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쪽은 고모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모와 조카의 가시방석같을 귀성길보다, 원수같은 조카를 반년간 거두고 먹이고 입힌 고모의 자비가 훨씬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으니까.

때마침 해운에게 전화가 왔다. 이때다 싶어 고모에게 나중에 답을 드리겠다고 둘러댄 뒤 집을 나섰다. 예림은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거머쥐었다. 자신이 도저히 살아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이 세상도 익명의 누군가가 늘어지게 하품하며 쌓은 도미노 같았다.

‘패는 나에게 없어. 난 그 인간에게 절대로 맞서지 못해.’


송시린.

그는 인제 감히 미워할 수도 없는 자신의 고모였다.



예림은 고모를 의식하지 않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시도했다. 드물게 고모와 함께 하는 아침식사가 끝나고 나면 어느새 자신은 설산 한복판에 있었다. 눈부시게 빛나기만 하는 새하얀 풍경은 버틸 수 있었지만, 그 풍경을 기점으로 다른 기억이 딸려 나오는 게 문제였다. 구렁이처럼 산을 칭칭 휘감은 도로엔 막 벗기 시작한 허물 같은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그 결빙 구간에서 예림은 하염없이 미끄러졌다.

손거울을 꺼낸 예림은 이리저리 얼굴을 비춰보았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많았다. 급식을 먹은 뒤 운동장으로 가 나희와 산책하기, 자신의 얼굴과 몸을 훑는 아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들의 환상을 채워주는 행동만을 하기, 나희에게 어젯밤 해운과 주고받은 문자메시지에 관해 이야기하기 등등. 나희는 예림이 가장 의지하는 친구였다. 해운의 이야기를 시시콜콜 늘어놓아도 나희는 진저리를 치지 않았다. 물론 싫은 내색까지 감추지는 않았다.


“인제 그만 좀 해라. 걔 얘기만 대체 몇 번째니. 네가 언제 배신할지 몰라 두렵다.”

예림은 나희의 팔짱을 끼고 간드러지게 웃었다. 남들이 볼 땐 나희의 반응이 매정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나희는 언제나 여유 넘치는 친구였다. 나희가 등나무 벤치를 가리켰다.

“자, 네 왕자님이 저기 계셔.”

신해운이 못 보던 여자아이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예림은 능청스럽게 양 눈썹을 치켜 올리고 해운에게 다가갔다. 해운에게 먼저 인사한 뒤 매우 다정한 말씨로 여자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자아이가 인사도 무시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자 예림의 얼굴에서 보조개가 싹 사라졌다. 여자아이는 해운에게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건물을 향해 잰걸음을 쳤다.


“저 앤 누구야?”

예림이 해운의 옆에 걸터앉으며 나희의 허리에 매달렸다. 나희는 덥다며 입으로만 불평했을 뿐 두 손으로 예림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예림은 바로 대답하지 않는 해운이 의뭉스러웠다. 그러나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모습이 만족스러워 대답을 재촉하진 않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으나 곧 차분히 대답해 주었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김세지이고, 부모님끼리 왕래가 잦아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친해진 사이라고 답했다.

예림은 다시 입가에 미소를 띠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중에 소개해 줄래? 네 친구면 나도 친해지고 싶어.”


종이 칠 때까지 예림은 나희의 품에 안겨 해운과 대화를 나누었다. 예림은 해운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설령 해운과 그 여자애가 단순한 친구 관계 이상이어도 상관없었다. 예림은 속으로 방금 전에 본 여자아이의 핏기 없는 입술, 여우처럼 찢어진 눈꼬리, 빗질이라고는 모르는 듯한 머리카락, 전혀 손댄 티가 나지 않는 교복을 남몰래 비웃었다. 예림은 한여름에도 타지 않은 새하얀 두 팔과 늘씬한 두 다리를 자랑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애초에 그런 여자애와 자신 사이엔 게임이 성립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