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화. 어떤 생존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by 선명

[안내]

총 69화로 완결된 장편소설입니다.

사건 이후, 끝나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는 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인제 그만 극복하는 게 어때?


어쩌다 그 말이 튀어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실언한 건 분명했다. 항상 케이크 끄트머리부터 시작하던 예림이 포크를 냅다 딸기 위로 푹 꽂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우리는 몇 년간 만나지 않았다. 극복하라는 조언이 뭐 그리 큰 실수였을까? 오늘 예림을 맞닥뜨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와 계속 연락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몇 년 만에 본 예림은 케이크 위에 장식된 딸기부터 공략했다. 그는 상처가 아물어도 흉터는 남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깨달음은 절대로 체념이 아니었다고도 못 박았다.

“중요한 건 내가 계속 살아있다는 거야. 그러니 너와 이렇게 다시 만날 수도 있고.”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 예림의 눈빛은 나와 마찬가지로 권태에 잠겨있었다. 지루함으로 한풀 꺾인 그 모습에 내심 안도하며, 나는 움푹 파인 생크림을 떠먹었다.

“…차라리 네가 편한 면도 있긴 했지. 너는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했었잖아.”

나는 내가 먼저 버렸던 이들에게 뻔뻔했고, 여전히 그랬다. 예림의 뼈 있는 말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발끈해 봤자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외면하고 싶었고 멀어지고 싶었다. 여력이 생기고 나서야 예림의 불투명한 앞날을 정돈해주고 싶었다. 한마디로 훼방을 놓았다는 말이다.

커피를 더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리필하러 카운터로 갔다. 인정? 인정이라… 어째서 나는 지금에서야 송예림의 존재 자체가 너무나도 불편하다는 사실에 직면하는 걸까. 어째서 예림의 소회를 듣고서야 그날의 정경을 뒤늦게 그려보는 걸까.



나는 처음으로 상상하고 있다. 이해득실도 없는 이 재현은 내 치부에 불과하다. 탁자 맞은편에 앉은 송예림을 다시 학교로 떠밀 필요도 없다. 이미 예림의 넋도 그날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2009년 12월의 끝자락. 저녁노을이 드리운 복도를 걷던 도중 예림은 휘청거렸을지도 모른다. 불어닥치는 찬바람에 양팔을 감싸고 한동안 먼 곳을 응시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잊은 채 자주 상념에 빠져들곤 했으니까. 지평선을 바라보는 예림의 눈에 서서히 힘이 들어간다. 예림의 속눈썹에 베어진 태양은 마치 꽃불처럼 타오른다. 만약 태양의 내부에 피가 흐른다면, 복도에 넘실대는 석양이 그 피일지도 모른다. 붉은빛이 사그라들기 전 예림은 자신을 기억해 낸다. 가방을 고쳐 매고 걸음을 재촉한다. 급한 와중에도 한 걸음, 한 걸음 타고난 맵시를 음미하듯 걷는다. 예림의 걸음걸이는 지금도 변함없으니 상상하는 건 일도 아니다.


대수롭지 않게 열린 과학실 문을, 만면에 웃음을 머금던 예림이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나는 상상할 수 있다. 실험대에 걸터앉은 낯선 소년과 눈이 마주치자 예림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급히 몸을 돌리지만 또 다른 소년이 문가에 서 있다. 나는 터지도록 움켜쥔 예림의 두 손을 본다. 그건 지금 우리 둘이 마주한, 이 탁자 위에 올려진 예림의 손과 사뭇 다르다. 볕에 그을린 손으로 예림이 차를 마신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살아남은 자의 손에서 눈을 떼기란 좀처럼 쉽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