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떠나가고 남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이 떠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드라마 한 편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어떤 질문 앞에서 멈춰 섰다.
요즘 재미있게 보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한 명은 직업도 탄탄하고 가정적으로도 안정된 사람이다. 다른 한 사람은 가정에서 안정감을 받지 못하고, 직업은 연극배우로 아직 자신이 원하는 삶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두 사람 모두 소개팅으로 만났다.
처음에는 두 번째 남자의 비중이 적었다. 그러다 친구처럼 다가가던 관계가 점점 변하면서, 그 남자의 마음이 커지기 시작한다. 극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궁금했는데, 두 남자의 비중을 50대 50까지 끌어올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멋지게 차려입고 분위기 있는 곳에서 식사를 마친 후 남자가 여자에게 말한다.
“이제 너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게.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이렇게 멋진 식사를 할 거고, 네가 편하게 올 수 있게 집도 마련할게.”
남자는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긴다. 오토바이 대신 차를 사고, 연극배우를 그만두고 드라마 오디션도 본다. 이 장면이 가장 설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자신의 삶을 바꾸는 모습. 그 사람과 함께할 미래를 위해 기꺼이 변화하려는 의지. 첫 번째 남자가 선택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두 번째 남자를 응원하게 됐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바꿨는데. 그래서 더 아플 것을 알면서도 그 끝을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준비한 데이트를 끝내면서, 남자가 묻는다.
“나 오늘 잘했어?”
여자는 말한다.
“응, 잘했어. 그런데 나는 계속 다른 사람이 생각나. 그 사람을 더 기다리게 하면 안 될 것 같아.”
여자는 다른 남자에게 달려간다. 드라마는 아름답게 마무리되지만, 내 마음은 계속 남겨진 남자에게 머문다. 그는 어떤 감정일까. 이 허탈함을 어떻게 감당할까.
여자와의 미래를 위해 남자는 자신의 삶을 바꾸기로 선택했다. 하지만 여자가 떠났다. 변한 자신만 남았다. 이제 이 변화는 무엇이 되는 걸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 변화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어쩌면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적응하며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이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분명 그는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이 아픔을 동반한 성장은 꼭 필요한 것일까.
우리는 자주 성장을 이야기한다. 스스로 선택해 도전할 때도 있지만, 오히려 피할 수 없는 경험 속에서 더 많이 성장한다.
그렇지만 모든 경험이 다 성장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성장이 될 수도 있고, 회피가 될 수도 있다. 나를 확장시킬 수도 있고, 나를 닫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경험에서 성장을 선택해야 되는것일까.
모든 경험을 성장으로 바꾸려 한다면 우리는 너무 쉽게 지친다. 때로는 직접 대면해 의미를 만들기보다, 일단 적응하고 덮어두는 선택이 필요할 때도 있고, 나를 지키기 위해 회피하는 선택이 필요할 때도 있다.
꼭 아픈 경험을 해야 할 필요도 없는거고, 그 경험에서 꼭 성장해야 할 필요도 없는것 같다.
모든 변화를 내 삶의 양분으로 소화할 필요는 없다. 어떤 경험은 도저히 삼켜지지 않아 뱉어내고 싶기도 하니까. 성장이 버거운 날엔 잠시 회피라는 그늘 아래 숨어보는 것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의 나로 도망치는 것도 나를 지키기 위한 용기 있는 선택이다.
이제 그 남자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이 변화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까. 아니면 잠시 내려놓고 살아갈까. 혹은 다시 돌아갈까.
아마 완전히 나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것은 자신의 것으로, 어떤 것은 잠시 그대로, 어떤 것은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나는 의미를 갖지 못한 변화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의미를 갖지 못한 변화는 언젠가 다시 꺼내보게 되니까. 그래서 선택은 두 가지로 좁혀진다. 그 사람이 남기고 간 변화를 나의 성장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거나.
남자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아마 끝까지 그 남자를 놓지 못한 채 이 드라마를 보게 될 것 같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준 이 남자를, 어떻게 놓아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