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후기] 거짓된 달램이 주는 숭고한 위로: <왕과

by 선라이즈

천만이 훌쩍 넘었다는 연일 이어지는 뉴스에 곧 내가 보러 갈 것을 예감했다. 매일 반복되는 육아 속에서 내 감정은 마른 화분처럼 푸석해져 있었기에, 무뎌진 나를 다시 일렁이게 해 줄 '천만 명의 이야기'가 간절했다. 남편이 퇴근하기 한 시간 전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무료하다. 신선한 생각과 감정이 필요해. 지금이 그때야.'


상영 시간표를 확인하고 남편의 배려 덕분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영화관 의자에 앉았다. 얼마 만에 가져보는 혼자만의 시간인가. 천만 영화가 기다리고 있는 지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미 아는 줄거리였기에 이 이야기가 어떻게 표현될지가 궁금했다. 사실 소재는 참신했지만 장면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크게 새로움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 하나만으로, 앞에 쌓아온 모든 시간은 제 역할을 다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영화의 마지막, 단종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게 된다. 그들이 원하는 방식의 죽음을 맞이할 수 없었던 단종은, 자신을 따뜻하게 품어주었던 엄홍도에게 마지막을 부탁한다. 사약을 받들라는 신하의 호통에도 단종은 방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끌어내려는 움직임에 단종은 안에서 소리친다.


“감히 왕족을 능멸하려 하느냐.”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지키려 하는 그 품위에 마음이 다시 한번 내려앉는다. 그때 엄홍도가 직접 역적을 끌어내겠다며 홀로 문 앞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나지막이 자신이 왔음을 알린다. 조용히 창호지에 작은 구멍이 뚫리고, 그곳을 통해 끈의 한쪽 끝이 나온다.


그것은 왕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단종이 스스로 목에 감은, 가혹하고도 처절한 선택의 끝이었다. 그 실체를 마주한 찰나,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엄홍도는 그 끝을 있는 힘껏 잡아당긴다. 강을 건너자며 오열한다. 극의 슬픔이 정점에 달하는 순간, 엄홍도가 아이를 달래듯 내뱉는 말에 끝내 나도 같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조금만 버티십시오.”


차가운 물에 던져진 시신을 건져 올리며 “춥지요, 따뜻한 곳으로 갑시다”라고 말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집에 돌아와서도 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5일째 고민했다. 처음에는 단종의 비극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내 마음을 건드린 것은 그 비극을 견디며 마무리하는 엄홍도의 모순된 감정이었다.


본래 누군가를 위한다는 것은 상대를 살리는 행동이다. 그러나 반대로 죽음을 선사하는 것이 유일한 구원이 되는 이 가혹한 모순이 내 마음을 먼저 할퀴고 간 것이다.


조금 더 직면해 보니 정말 나를 무너뜨린 대사는 이것이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조금만 버티십시오.”


이 대사는 지독하게 모순적이다. 본디 아이를 달랜다는 것은 고통을 먼저 견뎌본 어른이 두려움에 떠는 아이를 안심시키는 행위다. 하지만 엄홍도의 상황은 다르다. 이 사건은 어른인 그조차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며, 심지어 이 달램의 끝은 희망이 아닌 죽음이다. 그것은 결말을 바꿀 수 없는 '무력하지만 숭고한 거짓말'이었다.


나의 감정 중 이 부분이 건드려진 것 같다. 예전에 본 반려견의 안락사 장면이 떠올랐다. 애써 그곳은 편안할 거라고 위로해 주는 주인의 마음. 이 거짓된 달램의 목적은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것이 아닐 테다. 그저 '내가 너의 곁에 있다'는 진심, 그 거대한 외로움 속에 너를 혼자 두지 않겠다는 처절한 약속일 것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중 하나는 외로움이다. 평소에는 그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이 홀로 겪어내야만 하는 외로움을 마주하게 된다. 나에게는 출산이 그랬다. 부모님께 의지하거나 회피할 수 있었던 이전의 삶과는 달랐다. 출산은 피할 수도, 대리할 수도 없는 온전한 고립의 시간이었다.


그때 나의 외로움을 견디게 해 준 것은 남편이었다. 단종에게 엄홍도가 있었듯, 고통을 대신 짊어질 수는 없어도 그 지옥 같은 길목을 함께 걸어주며 나의 아픔을 안쓰럽게 여겨주는 '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버틸 수 있었다.


인간의 근본적인 공포인 죽음의 고통 앞에서, 나를 아끼는 누군가가 곁을 지켜준다는 건 가장 큰 위로이자 버텨내는 힘이 된다. 그런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괜찮다. 그런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은 하루 대부분의 에너지를 써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이지만, 그 가치를 절실히 느끼는 날을 우리는 언젠가 맞이하게 된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남긴 여운을 이제는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들여다보기 힘든 감정을 언어화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비로소 이 슬픔을 소화할 용기를 얻었다.


다음에 이런 감정을 마주할 때는 조금 덜 아프기를.


소중한 영화가 건넨 이 숭고한 위로에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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