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십 년 전 아버지는 두 번째 직업이었던 음식점을 마무리하셨다. 아버지 나이 서른에 어머니를 만나고 형편이 어려웠던 친가를 돕고 오빠와 나를 고등학교까지 졸업시킨 첫 번째 직업은 은행원이었다. 처음 들어간 은행이 합병되는 동안은 버텨냈지만 또다시 한번 합병되면서 아버지는 은행 지점장이라는 좋지만 달갑지만은 않은 자리를 겨우 몇 년 하고 은행을 나오셨다. 그때 나는 세상에 나만 큰일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했던 고삼이 막 되었을 무렵이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일 년 후 수능을 치르고 나서 재수를 하겠다고 방에 틀어박혀 나오고 있지 않을 때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되었다. 재수를 시켜줄 형편이 안되니 그냥 붙은 학교로 입학해서 다니라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재수를 못하다는 현실이 아니라 지난 일 년간 평소처럼 양복을 입고 아버지를 아침마다 출근하게 만든 게 나라는 사실에 처음으로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서럽게 울었던 거 같다. 재수는 하지 않았다. 형편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단 한 마디였다. 일 년 더해서 언어 점수가 오를 것 같은지 물으시고. 그렇지 않을 거 같으면 가는 게 맞을 거 같다고. 재수를 하지 않은 이유가 부모님의 권유가 아니라 다행히 나에게 있어서 한 번도 미련을 가진 적이 없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아버지는 음식점을 시작하셨다. 그동안 나는 대학을 졸업하였고 졸업 후에는 취직 시험 준비를 이십 대 마지막까지 하였다. 음식점을 하시고 처음 몇 년 동안은 직장을 다니 실 때보다 더 많은 수입으로 어머니가 편하셨다고 한다. 그 이후로는 갈수록 수입은 아버지의 노동력에 비해 좋지가 않았다. 계속해야 하는지 몇 년을 고민하시다 내가 스물아홉, 공부 마지막 해에 십 년 간의 사업을 마무리하셨다. 또 한 번 학업에 이어 이번에는 취업을 하지 못한 딸로 마음이 편치 못하게 일을 마무리하셨다. 천만 다행히도 다음 해에 가족 모두가 안도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그 사이 언제쯤부터 마음이 아프기 시작하셨는지는 정확히는 모른다. 고삼 때 아버지가 양복을 입고 출근하신 것처럼 자식들에게는 절대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려 하셨으니까. 장사를 시작하면서 아버지가 공황장애가 오신 거 같다. 언젠가 한 번 말씀하시기를 오빠가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집에 오는데 그 어느 때보다 기뻐해야 할 순간인데 전혀 기쁘지 않으셨다고. 내 맘이 내 맘 같이 않은 자신을 겨우 겨우 끄집고 오랜 기간을 버텨내셨다.
일을 마무리하시고 집에 계시는 동안 아버지의 병은 커져 만 갔다. 아버지가 노력하려 해도 애지 중지 키운 딸이 원치 않는 결혼을 계속하려 하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고, 마음의 병이야 어떻게든 버텨 보려 했는데 한쪽 귀가 안 들리기 시작하면서 망가지는 몸을 보니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결혼 전 아버지와 사이가 멀어질 대로 멀어져 거의 대화가 없던 때라 그저 아버지가 나약해지셨구나 마음의 병이 크셔서 걱정만 할 뿐 아버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결혼식 전 날까지 만해도 속상함과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시며 마음을 열지 못하셨던 아버지는 결혼 후 바로 마음을 다잡으셨다. 진짜 중요한 건 내 딸의 행복이니 마음을 열어야겠다고. 그러자고 엄마를 설득하셨다. 남편을 대하는 태도와 눈빛이 한순간에 변하셨다. 남편이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며 좋아하기 시작하자 나에게도 행복이 조금 열리기 시작했다. 남편이 보기에 나이가 일흔 이신대 나이가 무색하게 명철하시고 정이 많은 분이신 것 같다고 아버지 맘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의 컨디션에 따라 나의 행복도 영향을 받았다. 웃으시며 편안한 모습을 보이시는 날에는 예전의 아버지가 돌아온 것 같아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하다가도 어느 날에는 한쪽 귀에 이어서 다른 쪽 귀도 이제 잘 들리지 않아 찾아온 우울함에 대화에 잘 끼지 않으시는 모습을 보고 한없이 나도 가라앉았다.
그동안 보청기를 가족들이 아무리 권유해도 이야기도 꺼내기 전에 싫다고 거부하셨다. 아버지가 아직은 자신의 노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신다는 생각에 아버지의 의견을 존중해 왔다. 그리고 한두 푼이 아닌 보청기 가격이 아버지가 결정을 못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 같았다. 그러다 최근 내가 보청기 가격 생각하지 말고 일단 보청기를 맞추고 고민하자고 강하게 설득하게 되었다. 일 년 전 병원 검진도 가지 않고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에 검진 날짜를 바로 잡도록 말씀드렸다.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와 둘이 검진을 다녀오게 되었다. 검진 전에 자료를 찾아보며 난청을 알아보았다. 한 시간가량의 영상 자료 하나 만으로 필요한 난청의 문제를 거의 다 알 수 있었다. 검진 날 아버지 상태를 체크하기 위한 많은 질문들을 적어 내려가며 평소 안 쓰던 이성적인 머리를 최대한 써가며 상태를 체크하기 위한 핵심적인 질문들을 뽑아나갔다. 그럴수록 나는 오히려 머리가 개운해졌다. 문제가 간추려져 보였다. 보청기를 해야 할지 안 할지 몇 가지 질문이면 끝나는 문제로 보였다.
검진 날 병원 가까운 역에서 아버지를 만나 함께 걸어갔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어 아버지와 우산을 같이 쓰고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생각하고 있던 질문을 아버지께 물었다. 아버지는 정확히 본인의 상태를 알고 있지 않았고, 의사가 설명을 해주어도 잘 못 알아듣겠더라 하신다. 그러면서 본인은 마음의 준비가 다 되셨단다. 정말 마음의 준비가 되셔서 편안하다는 것을 보이고 싶으신 듯 허탈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이제 들리지 않는 한쪽 귀에 이어 나머지 한쪽마저 들리지 않으면 시골에 들어가 수도자 같은 생활을 하며 살 거라고 하신다. 사람들과 소통할 필요 없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며. 세상 어떤 질문을 해도 이미 정리된 것 같은 본인만의 생각을 항상 말씀해 주시던 아버지가 정작 자신의 병에 관해서는 욕심을 부리지 않으셨다. 실제 병의 진단과 증상보다는 자신의 마음의 준비가 우선이었던 거다.
도착한 병원은 대형 병원이라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전 내가 진료를 받으러 왔을 때는 한없이 삭막하고 정 없이 느껴져서 무섭기까지 했던 병원이 어떻게 하면 오늘 이 문제를 해결할 지만 집중하니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함께 무언가를 같이 해결하는 모든 순간이 좋았다. 예약 시간보다 대기 시간이 길어져 근처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순간이 좋았고, 진료실에 들어가 귀찮아하는 의사에게 죄송함을 무릅쓰고 아버지 상태를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모든 질문을 쏟아내고 나오는 것도 좋았고, 여러 검사를 받으러 아버지와 여기저기 같이 찾아가는 모든 순간이 좋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보청기 상담을 받으러 갔다. 그곳에서 보청기를 끼어보시고는 예전처럼 소리가 들리자 예상치 못한 기쁨이 아버지를 당황시켰다. 이어지는 상담에서 아버지는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보청기에 대해서 핵심 정보를 들으려 했고 생각을 정리하고 결정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 만을 하셨다.
돌아오는 길 우리는 승리를 자축하듯 계속해서 잘됐다고 지금이라도 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말하며 빗 속을 함께 걸으며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조금만 일찍 자식으로서 아버지에게 관심을 가지고 내일처럼 알아봤다면 아버지의 고통의 시간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았을까 후회도 남지만, 후회보다는 앞으로 아버지를 위해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지 고민해 보기로 한다. 우선 예쁜 손주를 하루빨리 안겨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