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는 크게 노력하지도 않아도 사랑을 받았다. 첫째로 이미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니 둘째로 태어난 딸은 이름도 조부모님의 관심에서 벗어나 아버지가 이쁜 한글 이름으로 지어 주셨다.
아버지는 본인도 자신의 딸을 그 정도로 이뻐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형편이 많이 어려운 집안의 장남 역할을 하느라 사회적 책임감으로 무장해서 그렇지 원래 정이 많고 다정한 사람이라 첫째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참고 있던 사랑을 부끄럼 모르고 쏟아내었다.
다음 해에 연이어 딸이 태어났다. 아들은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마지막 의무감까지 떨쳐버리니 둘째 딸에게는 센 소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딸아이의 애교에 무장 해제되었다. 퇴근 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딸아이가 달려와 아빠와 손을 마주 잡고 발에서부터 타고 올라와 거꾸로 한 바퀴 돌아 착지하는 곡예를 보여주는데 안 이뻐 할 수가 없었다.
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빠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억지 떼가 아니고서는 본인이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 있었다. 오빠가 가진 것은 본인도 꼭 가져야 했다. 더 크고 좋은 것으로. 그래야 공평했다. 학교에 들어간 오빠의 학교 준비물이 딸에게는 필요할리가 없을 텐데 꼭 두 개를 사야 했다. 동생은 오빠가 가진 것을 가지지 않으면 부모가 오빠를 더 좋아하는 것으로 여겼다. 분명 아빠는 자신을 더 좋아하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그것을 계속해서 목숨을 걸고 꼭 확인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딸은 하늘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아빠는 꼭 자신 만을 가장 사랑해야 했으니까.
아빠의 사랑을 굳힐 수 있었던 건 딸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이다. 오빠를 이기려는 그 욕심 많은 심보는 같은 학급 친구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친구들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아야만 했다. 본인이 잘하는 수학은 실수가 용납되지 않았고, 책을 한 권도 안 읽어 이해가 되지 않던 문과 과목은 독하게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버렸다. 학교를 다니며 딸은 부모에게 공부하라는 소리를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시험만 치르고 오면 제 성에 안 차 이미 집에서 울고불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었으니까.
아빠는 그런 딸을 보며 흡족해했다. 없는 집에서 은행장으로 먹고살 수 있었던 건 학창 시절 공부를 그나마 해서 명문고를 나왔기 때문이었다. 얼굴도 체형도 자신을 똑 닮고 자신의 말이라면 무조건 제 것으로 받아들이고 소화하려는 딸이 자신의 분신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반면 첫째 아들은 머리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최선을 다하지 않는 모습이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짓말을 해가며 놀러 다니는 모습에 화를 참지 못하고 한심하게 아들을 바라보며 눈빛과 말들로 상처를 주었다.
딸은 이제야 확신을 얻고 마음이 놓였다. 이제 진짜 아빠가 자신을 제일 사랑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하늘도 이기적인 그 딸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그 욕심을 다 채워주지 않았다. 이후 좌절과 실패를 적절하게 경험하게 해 주어 겸손과 배려를 알려주고 그렇게 나쁘지 않은 어른으로 성장하게 도움을 주었다.
이기적이었던 딸이 몇 가지 경험으로 변화하여 바르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 채워진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이 있어서였다. 수년간 이어진 취업의 길에서 딸이 좌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나는 너 없으면 못 산다’며 부둥켜안아주던 아버지가 있어서였다.
스물아홉 아버지와 딸은 어디를 나가도 손을 잡고 걸었다. 추운 겨울이면 딸의 손을 꼭 붙잡고 자신의 앞 주머니에 넣고 아빠는 걸었다. 취업으로 힘들어하는 딸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으니 더 따뜻하게 손을 잡으며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다음 해에 딸은 늦었지만 취업을 했다. 가족은 기쁘기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딸은 그렇게 처음으로 아버지의 품을 떠나 사회생활을 경험했다. 이제 아버지의 틀에서 벗어나 조금씩 제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말고도 중요한 게 생기기 시작했다. 조금 일찍 제 나이에 맞게 성장했다면 아버지의 상처가 조금은 덜했을까. 자신과 다른 생각과 의견을 갖는 딸의 말에 아빠는 제 딸을 잃어가는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신 받았던 사랑만큼 서로에게 상처가 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는 예전으로 관계가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점차 들기 시작하지만 딸은 그때의 추억과 사랑을 먹고살기 때문에 아버지와 멀어진 관계를 아직도 부정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