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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 Nov 07. 2024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

객관이란 이름으로 드러나는 주관적 경험


글의 끝맺음이 어려운 것 못지않게 나는 글의 시작도 꽤 어렵다고 생각한다. 적절한 비유를 들어 생각해보려 해도, 관념 속에서 이미지로 맴도는 생각을 글로 구체화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적절한 문장 을 이끌어 내는 일은, 적절한 서두로 원하는 내용을 엮어 내는 일에는 비할 바가 아닌 것 같다. 글의 서두는, 서두의 첫 문장은, 마른 종이에 물길을 내는 것과 비슷 할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나는 크고 작은 지난 일들을 다 놓지 못하여 하루에도 수 천 번씩 가슴이 뜨거워지다 아프다 그리고 괜찮아지곤 한다. 사막에 내리는 비 같다. 오래 바람에 풍화된 모래들은 자주 비가 내린 땅과는 달리 물을 삼 키는 법을 몰라서 그저 고여있다 흘려보내기만 한다.

사막의 모래에 얼마나 많은 잠재력이 있는가, 비 내린 직후의 사막의 모습을 처음 알게 되면 대개 놀라곤 한 다. 사막의 꽃밭에 비유하면 꽤 아름답게 들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결국엔 대부분의 시간은 그 무엇도 드러나지 않는 모래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인의 시선이 머문 그 잠시, 혹은 잊기 힘든 강렬한 순간의 인상을, 그 대상의 전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유쾌한 사실은 아니다


혼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잊히지 않는 과거의 기억과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감정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뱉어내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고, 묵은 감정을 뱉어낼 수단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대체로 글이다. 분노고 슬 픔이고 미련이고, 떠오르는 대로 적어내다 보면, 그게 누굴 향한 것이었건 결국 스스로에게 삿대질을 하는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꽤 많았다. 그러면 그제 야 다시 본래의 호흡을 되찾게 된다. 아주 많은 부끄러 움은 덤이다. 거절하고 거절해도, 내 의지와 관계없이 기어이 주머니에 꽂히고 마는 그런 덤 말이다. 무엇을 보고 화를 내고, 무엇을 읽고 화를 내고, 어디가 불편하 고 어느 지점이 영 거슬리고, 그런 것들을 가만히 모아 보다가 나는 어제 이런 결론을 냈다. 오늘 내가 언뜻 의미 없이 뻗는 손짓 하나도 여태 살아온 내 삶을 따르는 데, 애초에 손을 뻗는 법을 배운 과거가 있어 오늘도 그럴 수 있는 건데, 과거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게 얼마나 허상 같은지•••·•·. 그러니 결국 나의 과거라는 건 잊고 나아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품고 나아가야 하 는 것이다, 하는 그런 결론 말이다.


그렇게 생각을 되짚고 뒤집다 보니 다시 상담이다. 반복되는 단어, 자주 하는 표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캐 치해야 하는 사람 앞에서 작은 반응 하나도 내 스스로의 통제 하에 두고 싶었다. 괜한 오기라 부를 수 있겠고 필요 이상의 고집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뭐라 불릴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내가 그런 사 람이었다. "선생님 저는 (누가 됐든) 저를 고칠 수 있다 생각하지 않아요"라는 말을 했다, 자주. 다분히 의도적 이었던 말이었다. 돌이켜보니 그랬다. "선생님은 이 싸움(치료)에서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해요." 나 자신의 무력감을 표현하기 위한 말에, 선생님께선 "이건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에요"라고 언제나처럼 차분한 목소 리로 대답하신 게 아마도 마지막 상담 기점으로 일 년 전쯤이라고 기억한다.


그러나 선생님께 쏟아냈던 비관적인 생각이나 말들과는 달리, 상담치료에 임하던 시간 동안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상담은 무얼 위해 하는 것인지, 나는 상담을 어떻게 활용하여 나아가야 하는지 같은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답은 추상적이고 막연하 기만 했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곳에서, 그에 대한 대답의 작은 실마리를 얻었다. 몰아 치듯 영화나 드라마를 감상하며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만들어진 누군가를 보며 내가 화를 내는 것도 과거의 상처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요즘 퍽 자주 운다. 드라마나 영화가 이런 역할을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묵은 상처를 꺼내서 곪지 않게 실컷 드러낼 길을 내어 주는구나. 그렇게 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사소한 짜증 부터 깊은 분노까지, 기쁨부터 슬픔까지, 내가 느끼는 감정은 빠짐없이 스스로의 경험에서 새어 나오는 것이 었다. 그런걸 살피는, 훌륭한 상담자의 역할을 하는 거구나, 뭐 그런 대단치 않은 결론을 말이다.


자기 연민도, 자기 동정도, 자기혐오도 외부로 드러내 기에 유쾌한 감정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불쾌한 쪽 에 가깝다. 그러나 감정의 주체가 내가 아닌 남을 향하면, 그 감정이 스스로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 지지 않는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스스로를 감춘 채, 감 정만을 뱉어낼 수 있으니 아주 편리한 방법이다. 아마 그런 이유로 남 얘기가 제일 쉬운 일일 것이다. 타인의 얘기도 결국은 자신의 얘기라는 것을 스스로가 인지하 고 있는지와는 관계없이, 스스로의 존엄을 지켜낸다는 착각 속에서, 넘치는 감정들을 덜어내는 게 하나의 살 아가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Dec 16.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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