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날 마시는 막걸리 한잔

by 고작가

토요일과 일요일. 그 외 무수히 많은 공휴일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오아시스처럼 여기는 시간들이다. 하지만, 실외 일이 많은 건설업종은 조금 다르다. 달력 숫자의 빨간색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실내에서 일하는 현장을 제외하곤 비가 많이 오는 날엔 일을 쉬는 게 건설현장이다.

서귀포에서 비 오는 날이면 할 수 있는 일들의 선택이 좁아진다. 올레길을 걷거나 오름을 오르기도 힘들고, 자전거도 못 탄다. 바다수영을 하거나 한라산을 갈 수도 없다. 하지만 모처럼 쉬는 날 집에 있기는 아쉬워 나는 도서관으로 놀러 간다. 빗소리를 들으며 읽고 싶었던 책도 읽고, 이렇게 글도 끄적여 보는 조금은 낯선 행동들이 나를 조금 더 자유롭게 만든다.

그렇게 책 냄새에 취해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점심시간 즈음이 되면 빗소리가 조금은 다르게 들린다. 마치 부침개를 기름 부은 팬에 지지는 맛있는 소리로. 어쩔 수 없는 술꾼의 본능이 깨어난다. 평소엔 아무리 좋은 안주가 있어도 낮술은 좋아하지 않는 나인데, 이상하게도 비 오는 날이면 낮술 생각에 나의 침샘이 반응한다. 우선 전화를 돌려 함께 마실 수 있는 술친구가 있는지 섭외해 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곳 제주에서도 술친구들은 여럿 생겼다. 오늘은 무얼 먹을지 의논하는 행복한 시간. 아무리 비는 오지만 대낮부터 식당에 가서 판을 벌이는 건 취향에 맞지 않다. 간단히 집에서 만들어 먹거나 포장해 와서 먹는 걸 선호한다. 주종은 만장일치로 막걸리다. 간혹 소주를 마시기도 하지만 비 오는 날엔 막걸리에 부침개가 국룰처럼 정해진건 누가 정해놓은 걸까? 아마도 빗소리의 음향효과가 크지 않을까 싶다.


신선한 쪽파가 있다면 파전을 부쳐 먹어야 하지만, 어느 텃밭에나 무수히 자라나는 부추전이 오늘의 메뉴로 낙점되었다. 연한 부추를 밭에서 끊어와 흐르는 물에 살살 씻어둔다. 청양고추와 방아잎도 함께 딴다. 밀가루와 부침가루를 적당히 풀어 되직하게 반죽을 만들고 부추를 충분히 넣는다. 개인의 취향이 다르지만, 부추전에 건새우 가루를 조금 넣어보면 오묘하게 해물맛이 난다. 여기에 다진 청양고추와 방아잎을 찢어 넣는 게 나의 취향이다. 방아는 제주에 내려와서 처음 접한 일종의 향신료 역할을 하는 허브잎 같은 아이다. 산초와 비슷하기도 하고 고수나 박하 느낌도 나는데 제주에선 물회나 된장국에도 많이 넣어 먹는다.

집안에 기름 튀는 게 싫다면 골뱅이무침도 좋은 낮술 안주다. 통조림 골뱅이라도 약간의 맛 차이가 있다. 나는 언제나 유동 골뱅이를 선택한다. 생골뱅이보다 비싼 통조림골뱅의 뚜껑을 따고 귀한 골뱅이를 체로 건져낸다. 이때 통조림에 남은 국물을 조금 남겨두자. 골뱅이를 손가락 반마디 정도로 일정하게 칼로 잘라서 양을 늘린다. 오이, 양파를 어슷 썰고 대파는 돌돌 말아 길게 채로 썬다. 양념장을 만들어도 좋지만, 남자들끼리 있으니 간단히 초장에 고춧가루와 간 마늘, 남은 통조림 국물을 넣고 골뱅이와 야채를 버무려 준다. 이 무침을 더욱 맛있게 해 줄 수 있는 녀석이 황태채다. 황태채를 가늘게 찢어서 함께 넣어보자. 맛과 향, 질감까지 업그레이드시켜주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이것저것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게 귀찮다면 낮술 안주엔 모닥치기도 좋다. 모닥치기는 제주말로 “여럿이”, “다 함께”라는 의미로 제주 고유의 분식스타일이다. 보통 모닥치기는 떡볶이, 튀김, 김밥이 한 접시에 나오는데, 가게에 따라 김치전이나 순대를 주기도 한다. 보통 올레시장 끝자락에 가면 모닥치기를 파는 떡볶이집이 붙어있다. 모닥치기와 오뎅을 함께 포장해서 술상에 펼쳐 놓으면 막걸리 병이 무색할 정도로 호사스러운 상이 차려진다. 솔직히 비 오는 날 마시는 막걸리는 안주맛이 중요하진 않다. 그저 옛날집 툇마루에 앉아 처마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들이키는 한잔은 술꾼들에게 사막의 오아시를 선사하는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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