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공 하나에 담긴 인생
2006년, 군 생활을 마칠 무렵 나는 처음으로 골프채를 잡았다.
전역을 앞두고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막막하던 시기였다. 사회에서는 군대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버티기 어렵다는 불안감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때 상사가 한마디 툭 던졌다.
“사회에 나가서 영업이라도 하려면 골프는 무조건 칠 줄 알아야 한다.”
마치 살아남기 위한 필수 과목처럼 들리던 그 말은, 막연히 사회라는 미지의 무대에 나서야 했던 나에게 묘한 설득력을 가졌다.
곧장 부대 근처의 작은 실내 골프 연습장을 찾아갔다.
강사는 말없이 내 앞에 선 후 단호하게 말했다.
“최소 3개월은 배우셔야 기본기를 잡습니다.”
작대기로 가만히 서 있는 공을 치는 게 뭐가 그리 어렵나 싶어 속으로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라 믿고 결재를 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골프 인생은 헤드도 달려 있지 않은 연습용 골프채를 휘두르는 것에서 출발했다.
연습장에 등록하면 강사가 곁에 붙어 차근차근 알려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강사는 이따금 다가와 자세를 교정하는 말만 던지고는 사라졌다.
강사의 지적을 들을 때마다 몸은 굳어졌고, 욕심만 커져갔다. 그렇게 2주일이 흘렀다. 땀은 흘렸지만 성취감은 없었다. 재미를 느끼기도 전에 지루함이 먼저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강사가 내게 7번 아이언을 건넸다. 설레는 마음으로 스윙을 했을 때 공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며 손끝에 짜릿한 진동이 전해졌다.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마치 내 안에 숨어 있던 또 다른 감각이 깨어나는 듯한 쾌감이었다. 순간적으로 ‘금세라도 골프 선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자신감이 치솟았다.
그러나 그 자신감은 곧 연습에 대한 게으름으로 이어졌다. 혼자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처음이자 마지막 골프 레슨은 한 달 만에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여전히 나의 골프 실력은 들쭉날쭉하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80대 초반의 스코어를 기록하다가도, 마음이 흔들리거나 몸이 무거운 날에는 100타를 훌쩍 넘기기도 한다.
잘 맞는 날에는 다음번엔 꼭 싱글을 치겠다 호언장담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날에는 죄 없는 골프채를 탓하거나 바람과 잔디를 원망한다.
평소에 연습장을 찾지 않고 ‘필드에서 연습한다’는 어설픈 마인드로 임하니 결과가 일정치 않은 것도 당연하다. 골프는 나랑 안 맞는 운동이라 생각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골프를 좋아한다.
돌이켜보면 골프는 인생을 닮아 있다.
잘해보겠다고 힘을 잔뜩 주면 오히려 어긋나고, “될 대로 돼라”는 마음으로 힘을 빼면 공이 정확히 날아간다. 인생도 그렇다. 지나치게 조급하거나 집착하면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마음을 비우면 오히려 순조롭게 흘러간다.
골프든 인생이든, 잘되면 잘되는 대로, 안되면 안 되는 대로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받아들이는 것이 결국 성숙이라는 것을 골프가 일러주었다.
또한, 골프는 연습한 만큼 성적이 드러나는 정직한 운동이다.
하루하루 꾸준히 휘두른 스윙의 횟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마치 인생에서의 노력과도 같다. 순간의 요행으로는 잠깐 웃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긴 시간 쌓아 올린 갈망과 노력이 결국 빛을 발한다.
며칠 전, 20년 전 특전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기들과 처음으로 라운딩을 했다.
반가운 얼굴들 사이에 놀랍게도 골프를 시작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은 친구가 둘이나 있었다. 라운딩을 앞둔 일주일 동안 단체 카톡방은 들썩였다.
누군가는 스크린 골프장에서 ‘사전 답사’를 했다며 인증숏을 올렸고, 또 다른 친구는 매일 연습장을 찾는다며 열정을 불태웠다. 그들의 열심 앞에서 20년 구력을 자랑하던 나조차 은근히 긴장됐다.
라운딩 당일, 첫 홀에서의 긴장감은 생각보다 컸다.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서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 채 스윙을 하자 공은 어이없게 숲으로 날아가 버렸다.
스스로를 다잡으며 라운딩을 이어갔지만, 결과는 기대와 달리 초라했다. 끝나고 스코어를 비교해 보니, 놀랍게도 우리 네 명의 성적은 큰 차이가 없었다.
20년의 세월이 쌓인 나와 이제 막 시작한 친구들이 비슷한 숫자를 기록한 것이다. 순간 허탈함이 스쳤지만, 이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그날의 웃음과 대화, 함께한 시간이었다.
그날, 우리는 예전 군 생활의 추억을 떠올리며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었다.
골프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스코어에 연연하지 않고, 함께했던 시간 자체가 선물이었다.
골프는 단순히 공을 치는 운동이 아니라, 사람을 이어주고 시간을 선물하며 인생의 무게를 되새기게 하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인생에서 홀마다 새로운 장애물이 나타나듯, 골프장에서도 벙커와 해저드가 우리를 시험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겨낸다.
그래서 나는 골프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