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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순금 Jan 25. 2024

서른넷의 유학일기(1)_어쩌다유학

살다 보면 유학도 가고 그런 거지

수년 전 친구와 대구에서 꽤 유명하다는 사주 집에 갔던 적이 있다. 사주 봐주시던 분이 내게 “어릴 적에 유학을 보냈으면 장차관을 했을 텐데 그 정도는 이미 늦었지만 늦게라도 가면 그래도 공부로 먹고는 살 것”이라고 했는데, 난 그냥 외국에 나가 사는 게 좋았을 뿐, -당시 남아공에서 일하던 중 잠깐 한국 방문했을 때였다 - 유학 생각 같은 건 구체적으로 해보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나는 2년의 남아공 파견을 마치고, 끝물에 알 수 없는 병을 얻었고, 한국에 들어와서 복직했다가 6개월 만에 병 휴직을 하고 환자 생활을 했다. 1년 남짓 전국의 대학병원을 전전한 끝에 알게 된 나의 병명은 중증 근무력증(Myasthenia Gravis). 신경 전달 물질인 아세틸콜린 수용체의 신호 전달을 방해하는 (쓸데없는) 항체를 자가 생성해 근육 활동을 저해하는 병이다. 다행히 호흡근이나 내장근까지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눈과 얼굴 근육에만 불편함을 느끼며 생활하는 중인데, 남들에게 직접 보이는 부위다 보니 온갖 외부 활동에 여간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만큼 불편한 안검하수와 얼굴 근육의 비대칭적 뒤틀림, 증상이 심해질 때 가끔 동반되는 사지 무력감이나 방광근으로 인한 절박뇨 등. 이미 내가 계속해서 학교 선생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접어버렸고, 그럼 뭘 하고 살까. 우리 집은 돈도 없어서 결국 병원비 내가 벌어야 하는데, 그럼 또 힘들 테고, 병은 낫지 않을 테고. 그냥 죽을까. 어차피 별일 못하다 죽을 거면 이참에 평생 꿈꿔 왔던 북극에 가서 여생을 보낼까. 스발바르 제도는 비자도 필요 없다고 하던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 날 아빠한테 선언하듯 말했었다. 나, 이 병 좀 괜찮아지면 학교 그만두고 유학 갈 거야. 어차피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그냥 해보고 싶었던 거나 해볼래. 아빠는 그냥 설마 그러겠어,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긴 보태줄 것도 없으니 할 말도 없었겠지.


주된 증상은 눈에 있었다. 눈이 불편하면 할 수 있는 일이 현저히 적어진다. 우리가 생각하는 거의 모든 일이 다 눈을 떠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루 24시간은 꽤 긴데, 책도 읽을 수 없고, 드라마도 볼 수 없다. 하지만 누워있다고 바보가 되기는 싫었다. 그래서 누워서 오디블과 EBS를 계속 들었다. 소리만 들어도 괜찮은 걸로. 그렇게 오디오북으로 해리포터 전권을 8번씩 듣고,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를 오디오로만 두 번 돌리고, 변춘수 선생님의 생명과학 1, 2도, 남궁진 선생님의 고교 문학도 한 번씩 들었다. 눈 감고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는 건 다 찾아 들었다.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어서가 아니라 바보 방지에는 고교 EBS가 최고였던 것뿐이다. 누워서 하루 8시간씩 영어 오디오북과 수능 강의를 듣던 내게 친구가 그랬다. “너 그거… 근무야.”


그래도 십수 일 동안 눈 감고 생활하다 보면, 온 힘을 다해 어느 하루 정도는 정상인처럼 눈을 뜨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서산 시골에서 요양을 하던 나는, 날 잡고 하루 강남에 아이엘츠 시험을 보러 갔다. 인생 첫 결과는 overall 6.5였다. 이 정도면 해외 아무 대학에나 입학 원서는 넣을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그때부터 뭔가 진짜 유학을 가볼까? 하는 생각이 좀 ‘구체적으로’ 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럼 뭘 공부할까? 교육은 지긋지긋해. 과학은 머리가 나빠서 안 되겠어. 이왕이면 해외에서 일자리를 구해서, 사람 없는 외국 시골에서 동물들과 평화롭게 살다 조용히 죽고 싶었다. 그럼 결국 전문 기술직이지. 그래서 수의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이엘츠 6.5는 나쁘지 않은 점수지만 훌륭한 점수도 아니다. 욕심이 더 났다. 눈은 여전히 불편했지만 루저가 되고 싶진 않았다. 두 번 더 도전해서 결국 overall 7.5를 받았다. 이 즈음 나는 그냥 눈 불편한 건 개나 줘버리고 하루에 몇 시간씩 내가 갈 수 있는 해외 수의대를 헤집듯 조사하고 다녔다. 그러다 체코까지 찾아보게 됐다.


어차피 인생에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 공부하다 병이 악화돼서 끝까지 못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체코? 내게 나라란 결국 사람 같은 것이다. 살다가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처럼, 삶에서 어떤 나라를 만날지 예측해 본 적도, 끈질기게 추구하거나 잡아본 적도 없다. 참 많은 나라들이 내게 왔다가, 떠났다. 체코도 그럴 것이다. 수의대라는 매개물로.


공식적인 합격 서류까지 다 받고 대강의 윤곽이 다 나온 뒤에야 나는 아빠에게 통지했다. 두 달 전에 말했는지, 한 달 전에 말했는지 기억은 안 난다. 나 9월에 체코 갈 거야. 친척들은 난리가 났다. 걔 몸도 성하지 않은 애가 어딜 가냐고, 왜 안 말렸냐고. 걔가 돈은 어디 있냐고. 아빠는 ‘걔를 어떻게 말려요.’ 했다고 한다. 뭐, 말릴 생각은 있으셨고?


그렇게 어찌어찌 해서 나는 작년 9월에 체코 브루노 수의대에 입학했고, 이제 한 학기를 마쳤다. 성적은 올 A로 마무리했다. 학비, 생활비도 벌어야 해서 꾸준히 온라인으로 과외도 했다. 체력 떨어지면 더 이상 돌아갈 길도 없으니까 매일 운동도 조금씩 해가면서. 이래서 저래서 공부 못한다고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세상 한심한 얼굴로 멸시와 코웃음을 선물할 것이다. 이 학교가 하버드도 아니고, 내가 역사에 길이 남을 천재도 아니지만 적어도 누가 체력 탓을 한다면 나는 당당하게 꼰대가 되기로 했다. 나는 병적으로 체력이 떨어지는 중증 근무력증 환자지만 눈뜰 힘이라도 남아있는 한 A를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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