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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순금 Aug 25. 2023

열정 1도 없는 우즈벡 여행 - 부하라편(3)

타슈켄트 생존기

어차피 늦게 시작한 하루, 천천히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방 안이 너무 더웠다. 내가 에어컨을 너무 약하게 틀었나? 나는 평소에도 에어컨을 28도로 맞추는 사람이라(그럴 거면 왜 트는 거냐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30도와는 분명 다르다구.) 바깥 더위가 너무 강해서 28도로는 좀 부족한가보다 하고 온도를 낮추러 갔더니, 에어컨이 안 되는 거다. 로비에 전화를 했다.

 

: 헬로, 디스 이즈 룸 208. 에어컨이 안 되는 것 같아요.

로비: 예.. 지금 다 안돼요.

: 네? 건물 전체가 안 된다는 뜻이에요?

로비: 지금 부하라 전체가 전기가 부족해요. 너무 더워서 그래요.

: 그럼 언제 들어와요?

로비: 전기공이 보고는 있는데 한 시간은 걸릴 거에요.

: 네, 알겠어요.


우즈벡 말 해석: 한 시간 걸린다. = 세 네시간 걸려도 잘 모른다.

그래서 천천히 준비하던 속도를 페이스 업 해서 후닥닥 준비를 마치고 아예 밖으로 빨리 나와 버렸다. 안도 밖도 더울 거라면 빨리 나가서 뭐라도 하는 게 나았다.

 

부하라 여행을 굳이 7월 중순에 잡은 것은 실패 중 대실패다. 섭씨 40도를 훌쩍 넘긴 부하라의 뜨거움이란! 이 때부터 외출 전에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변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범인은 니플패치. (이하 니패) 더우니까 브라는 하기 싫어서 훌렁훌렁 원피스를 입고 니패를 했는데, 패치 안으로 땀이 차기 시작한 것… 아… 젠장. 한 발짝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전달되는 몸의 진동에 왼쪽 오른쪽 니패가 번갈아가며 1센티, 2센티씩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우산대를 왼쪽 가슴에 딱 붙이고 니패 탈락을 방지해 보려고 했지만 우산대가 하나 밖에 없는 걸 어쩌나. 핸드폰 잡은 손은 오른쪽, 우산대는 왼쪽 가슴에 붙이고 뭔가 어정쩡하고 어색하지만 ‘쟤 가슴 붙잡고 가는 거 너무 티나’지 않게 걸어보려고 애썼다. 가슴아 이럴 때 말고 평소에 좀 존재감을 드러내 주면 안 되겠니, 언니 속상해.


Lyabi Hauz 레스토랑에서의 뷰 (Lyabi House Hotel하고는 완전 다른 곳이니 주의) - 여기선 물만 마셨다.
Poi Kalon 사원에서 나오면서 본 풍경. 여기 맞은편에 Kalon Minaret 있음.
Bolohauz 기도시간. 남자들 엉덩이만 실컷 보고 왔다.
맨어깨 가리는 우즈벡 전통 패턴 스카프는 무료. 깨끗한 거 줘서 좋다. 나갈 때 반납하면 됨.


포이 칼론 사원에 들어갈 때 표 주는 직원이 나의 불경스러운 복장을 보고는 친절하게도 맨 어깨에 두르라고 스카프를 하나 빌려줬는데, “라h맛(Rahmat).” 하고 어깨에 대충 둘렀지만 내 신경은 온통 앞에 집중되어 있었다. 뭐라 자세히 말씀드릴 순 없지만 지금 불경스러운 건 어깨가 아니거든요.


결국 관광은 덜렁덜렁한 니패 때문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포이 칼론(Poi Kalon) 사원은 5분만에 둘러보고, 부하라의 상징인 칼론 미나렛(Kalon Minaret)도 존재만 확인하고, 몇백 미터 떨어진 아크 시타델(Arc Citadel)까지 기를 쓰고 갔더니 안에 박물관 밖에 없다고 해서 바깥 성벽만 구경했다.


건너편 볼로하우즈(Bolohauz)에 가는 중에 드디어 왼쪽 니패가 탈출에 성공!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옆구리를 찰싹! 때려 허리 중간 쯤에 붙였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 없겠지만) 혹시 누가 봤더라도 그냥 파리 한 마리 잡은 줄 알겠지? 어떻게든 앞섶을 부여잡고 볼로하우즈까지 갔다. 마침 기도 시간이어서 절하는 남자들 엉덩이만 실컷 본 다음 서둘러 얀덱스 택시를 불러 Ayvon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Lyabi House Hotel과 Ayvon Restaurant 같이 운영함. 팻말이 작아 못 보고 지나쳤다가 돌아옴.

Ayvon 레스토랑은 서양식 레스토랑이고 Lyabi House 호텔이랑 겸해서 운영하고 있다. 골목에서 보면 굉장히 허름해 보이는데 막상 들어서면 로비도 비교적 세련되고 무엇보다 중정이 예쁘다. 중정을 가로지르면 레스토랑이 있다.

관광 비수기에 손님이 없는 늦은 점심 시간에 갔더니, 손님이 올 줄 몰랐던 알바생들이 세네 명 옹기종기 모여 앉아 멋있는 척하는 남자 직원의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다. 인테리어는 매우 이국적이었지만 분위기는 마치 일본 청춘 영화에서 이제 막 첫사랑이 시작될 것 같은 방과후 서클실 같았다.

어머, 이모가 젊은이들 좋은 분위기를 깨 버려서 미안해.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쳐 나왔더니 안에서 직원이 웰컴, 웰컴이라고 어서 들어오라고 했다. 들어가면서 “But you can keep playing the piano.” 했지만 민망했는지 더 이상 치지 않았다. 역시 이모가 미안해. 여주 앞에서 좀 더 멋있는 척할 기회를 빼앗았구나.


어쨌든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가슴도 보송, 내 마음도 보송해졌다. 화장실 가서 니패를 씻어 다시 붙이니 드디어 되찾은 양손의 자유! 비로소 마음 편하게 레스토랑 인테리어와 메뉴판이 마치 세계 문화유산인 양 찬찬히 관광했다.

디냐 주스와 샐러드와 파스타를 시켜 천천히 배부르게 먹는 동안 나 말고 손님은 한 명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맛있는데 왜 아무도 안 오지? 너무 더워서 부하라 전체에 관광객이 적은 시즌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나야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디냐 주스, 부라타 치즈 딸기 샐러드, 내부 인테리어, 연어 로제 크림 파스타. 혼자 많이도 먹었다.

마지막 날은 인터넷 검색해서 맛집이라고 나온 Zaytoon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여기도 서양식 레스토랑이다. 어차피 기차역 가는 길이라서 동선도 적절했다. (우즈벡 식당 절대 안 감) 쿠스쿠스 샐러드와 모히또를 먹었는데 아주 맛있어서 대만족. 간당간당 아슬아슬하게 아프로시얍 열차를 타고 타슈켄트로 복귀했다. (한국 기차 생각하고선 출발 5분 전에 도착했는데 나보다 직원들이 더 급함. 20분 전에는 갔어야 하나보다.)


Zaytoon 식당 내부. 깨끗하고 직원이 영어도 곧잘 했다.

부하라 여행 첫날은 택시와 호텔 때문에 전투하느라 진을 빼고, 둘째날은 니플패치 지키느라 제대로 관광도 못 했지만, 그나마 부하라 여행에 대해 만족스러운 점을 좀 찾아보자면 이렇게 해서 우즈벡 주요 관광지를 다 돌아봤다는, 이른바 “도장깨기 완료!”에 대한 성취감, 그리고 아프로시얍 고속열차 드디어 타봤다는 나름의 뿌듯함, 맛있는 식당 두 군데 찾아서 2박 3일 동안 우즈벡 음식 안 먹어도 됐다는 다행스러움 정도가 남는 것 같다.

 

행동특성 및 세부의견: 남다른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체류 기간 내 우즈벡 내의 주요 관광 도시들을 전부 답사하였으며, 예약이 어렵다는 아프로시얍 고속 열차도 알차게 이용함으로써 비행기를 탈 때보다 교통 예산을 현저하게 아낌. 음식에 대한 개인적 호불호를 잘 이해하고 있어 소소하게 식도락 여행을 즐김. 향후 우즈벡에서 즐겁고 합리적인 생활을 영위할 만한 경지에 도달했다고 보이나… 귀국함.

그래도 본인의 게으름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는 충분한 발전 가능성이 있음.

* 발전가능성: 아무것도 잘한 게 없을 때 쓰는 마법의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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