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즐겨하는 일 중의 하나가 목욕탕 가는 것이다. 다행히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목욕탕이 지역에서 시설 좋기로 넘버 3안에 든다. 직장인인 나와 고등학생이 된 딸의 일상도 서로 바쁘다 보니 평일도 주말도 시간을 서로 맞추기가 어렵다. 모처럼 접점을 찾았고, 전날부터 반드시 이번에는 목욕탕에 갈 것이라는 다짐을 눈빛으로도 주고받았다.
프로축구 선수의 꿈을 안고 중학교 때까지 축구학교에 다니던 딸이 뜻하지 않게 축구를 그만두고, 지금은 아마추어 축구클럽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낮에는 학생으로, 방과 후에는 축구인과 예술인 등으로 알차게 보내는 딸. 이렇다 보니 나보다 하루 일상이 바쁘다.
보통의 고교 1학년에 비해 키도 크고, 꾸준히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그런지 신체적 분위기가 단단하며, 날렵해 보인다. 또한 헤어는 숏커트이다 보니 눈썰미 없는 사람이 보면 남자처럼 보이나 보다. 중성적인 이미지가 매력이라 다니는 여고에서도 인기가 있는 편이다.
중성적 이미지가 강해서 유아기 때도 남자아이처럼 보일까 봐 외출할 때는 꼭 짧은 머리를 쓸어 모아서 나비 핀을 꽂곤 했었는데, 지금은 누가 봐도 예쁜 여자 청소년이다.
저녁 9시 10분. 일과를 마친 딸은 주 1회 동호회에 참석한 엄마가 오기만을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목욕탕에 가려고. 아주 신나는 일이다. 엄마와 함께하는 사우나는 아주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이라고 했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그 날렵한 몸놀림은, 에너지 주체를 못 하는 유치원생 때 딸을 보는 듯하다.
딸이 목욕탕을 좋아하는 이유 중 또 한 가지는 안마기에서의 휴식 시간이다. 카드를 즐겨 쓰는 우리가 안마기 이용을 위해 현금을 꼭 챙긴다. 이건 잊어버리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가 이때 발생했다.
나보다 먼저 나가서 마무리를 다 한 딸은 목욕탕 루틴에 맞춰 안마기를 이용하고 있었다. 딸이 있는 곳으로부터 뭔가 불안한 신호가 감지됐고,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마침 나도 마무리를 하던 중이었기에 바로 딸에게 갈 수 있었다.
이미 상대방 아주머니와 딸과의 무슨 말이 오고 갔고, 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빨갛게 상기된 딸의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니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지만, 곤란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바로 알아차렸다.
"아줌마! 어딜 봐서 남자예요? 그리고 여기에 어떻게 남자가 들어와요?"
내 말에 아줌마는 대꾸했다.
"3층 찜질방에서 남자가 들어오기도 해요!"
"누가 봐도 여잔데, 상대방이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 안 하세요? 나이 한 질라 드신 분이 왜 말씀을 함부로 하세요?"
아주머니는 더는 말을 잇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분이 실수를 인정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른다. 딸에게 사과도 하지 않고, 잠깐 딸의 얼굴을 살피는 그 찰나에 사라지고 없었다.
10분짜리 안마 서비스가 7분을 남겨놓은 상황이었는데, 나는 딸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날 줄 알았다. 그런데 딸은 안마기가 멈출 때까지 이용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까 있었던 일로 인한 딸의 감정을 살폈다.
"미안해. 엄마가 한 말 때문에 더 곤란했던 건 아니지?"
"괜찮아."
"엄마는 아까 함부로 말한 아줌마를 혼내주고 싶었어."
그랬다. 나는 내 딸의 즐거운 목욕탕 휴식을 망친 아줌마를 혼내줬다. 내 딸의 마음을 말로 헤집어 놓은 어른을 혼내주고 싶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내가 과했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그분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말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음을 말이다.
딸이 엉뚱한 오해를 사서 안 들어도 될 말을 듣고 난감해하는 표정을 본 순간, 내 속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처구니없는 말이 딸에게 상처를 냈을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딸을 가로막고 싫어하는 말을 던진 어른과 대치했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응급 상황이었고, 딸은 응급 처치가 필요했다.
'엄마가 혼내줄게!'
나에게도 엄마가 있다. 아빠는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 차마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단어들을 자식들에게 쏟아내셨던 아빠를 누구도 혼내지 않았다. 그러면 쓰냐고 그런 말을 자식들에게 하면 안 된다고.
그날들 속에 엄마도 있었지만, 엄마는 우리의 방패막이가 되지 못했다. 엄마도 그날들의 피해자였다. 그런데 가끔 생각한다. 고매한 피해자였으면 어땠을까를. 아빠를 혼내주는 엄마였으면 어땠을까를.
그런 엄마를 이제 내가 살핀다. 돌본다. 동기부여를 시킨다. 말썽을 부리는 오빠로부터, 엄마를 말로 지킨다. 나도 오빠를 혼내주지 못한다. 그러면서 엄마에게만 말로 힘을 준다.
상처받던 모성의 대(代)를 끊고, 의지할 수 있는 튼튼한 가족의 끈으로 묶고 싶다. 그래서 내 딸만은 잘못된 어른들로부터 지킬 것이고, 고상하고 세련된 엄마로 기억되고 싶다. 그렇기 위해 나는 오늘도 배우고, 그 힘으로 딸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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