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오 킬로그램을 꽉 채워 싣고, 방콕으로

세 식구 태국 여행 이야기

by 피자치킨피치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행이다. 올해 1학기는 우리 세 식구 모두에게 새로운 형태의 고난이 있었다. 피치는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되어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뭉미는 대학원에서 첫 학기를 마쳤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석사 과정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하루 이틀 만에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 덜컥 응시원서를 쓰고는 늦깎이 대학원생이 된 것이다. 사실 뭉미는 대학원 동기 중에 막내이므로 늦깎이라는 말도 조금 우습긴 하다. 사회 통념 상 대학원생으론 늦은 나이이지만 학과의 특성상 여기에서는 어린 나이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직장에서 요 보직을 맡았다. 그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어려움을 몸과 마음으로 부딪쳐 극복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정말 그랬다. 우리 세 식구 모두에게 이번 여행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여행인 것이다.


우리는 여행을 준비할 때 짐을 줄이고자 노력했다. 옷도 조금 부족하게 싸고 약이며 먹거리며 현지에서 충분히 조달할 수 있다며 열심히 줄여나갔다. 그러나 우리의 짐 줄이기는 서로 다른 분야에서 양보할 수 없었던 것들이 있었다. 줄이고 줄여도 수하물 무게 한계를 목구멍 끝까지 꽉 채웠다. 한 사람 당 15kg, 세 명이니 45kg이 한도인데 45kg을 딱 맞춘 것이다. 나는 수영과 촬영 부분에서, 뭉미는 약과 먹거리에서, 피치는 책에서, 셋이 각기 다른 분야에서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고 이를 기어코 트렁크에 욱여넣고 말았다.


공항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출국 수속을 번개같이 끝내고 새로 생긴 스카이 허브 라운지에서 시간을 보냈다. 언제부터였을까 우리 가족은 해외 여행길에는 꼭 라운지를 들른다. 일찌감치 공항에 도착해서 출국 수속을 끝내고 미리 인터넷으로 구입해 두었던 면세품을 수령하고 나면 라운지에 앉아서 밥이며 생맥주며 라면 등을 잔뜩 먹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여행이 펼쳐질지에 대해 꿈에 부푼 대화도 나누고 출국 전에 혹시 놓친 일은 없는지 점검도 한다. 미리 구입해 둔 이심 활성화도 하고 미처 프린트하지 못했던 여권 사본과 각종 바우처들을 출력하다 보면 어느새 비행기를 탈 시간이 다가온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륙 시간 서너 시간 전에는 공항에 도착한다. 기다림을 행복으로 채워주는 라운지라는 완충재를 믿고서.


비행기 이륙이 살짝 늦어졌다. 원래도 깊은 밤중 도착 예정이었는데 더 늦어지게 되다니. 그래도 여행을 시작하는 이 시간은 마냥 좋았다. 조금 늦으면 어때. 이왕이면 두 시간 정도 연착되어도 좋겠다는 농담을 던졌다. 우리 여행자 보험에서 이륙 지연에 대한 보상이 두 시간부터 적용되기 때문이었다. 말이 씨가 될까 봐 살짝 걱정하긴 했었는데 처음에 고지했던 만큼만 늦어져서 다행이었다.


비행기가 뜨자마자 미리 오프라인 모드로 저장해 두었던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단숨에 다 보았다. 괜히 전 세계적인 열풍이 부는 게 아니었다. 노래 하나하나가 다 좋고 소소한 볼거리도 많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 봤다. 영상 보기가 지겨울 때면 미리 챙겨둔 스도쿠로 가족 대결을 하기도 했다. 읽을 책도 준비했었는데 영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원래 아홉 시, 늦어도 열 시면 잠자리에 들던 피치는 버티고 버티다가 짜증을 잔뜩 뱉어내며 엄마 아빠 사이에 모로 누워 쪽잠을 잤다. 하필 피치 머리 쪽이 내 쪽이다. 내 허벅지가 높아 다리를 베고 자는 것이 영 불편해 보였다. 가뜩이나 좁은 자리를 비껴 앉아 피치가 편안하게 머리 둘 곳을 마련해 줬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비뚤게 앉은 허리가 뻐근한 게 영 힘든 게 아니었다.


반년 전 발리에 갈 때는 비즈니스석을 타고 갔었다. 완전히 침대처럼 펴지는 좌석이 제공되는데도 일곱 시간이 넘는 비행 동안 우리 셋은 모두 잠 한숨 자지 않았었다. 샴페인에 와인에 식사에 끓인 라면에… 온갖 서비스 중 하나라도 놓칠세라 잠잘 시간이 어딨어. 그런데 웃긴 건 이번에는 좁디좁은 자리이고 눕지도 못하는데도 어떻게든 잠만 잘 잤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의 비행이었는데도 말이다. 비즈니스석은 단순히 돈을 더 내고 자리만 좋은 것으로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었다. 먹을 것, 마실 것, 놀 것,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해 줄 것 등 비행시간마저도 행복한 여행의 일부로 만들어주는 종합 서비스의 하나인 것이다.라고 글을 써서 다음 여행에는 비즈니스석을 끊어보자고 아내에게 살짝 어필해 본다. 피치에게 가뜩이나 좁았던 자리의 일부를 양보하느라 뻐근했던 내 허리를 한 번 더 언급하면서.


늦어진 이륙 때문에 도착 시간도 예상보다 많이 늦어졌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볼트로 택시를 잡아탄 시각이 현지 시각으로 새벽 한 시 반(우리나라 시각 세 시 반)이었다. 그랩과 볼트 중 그랩은 현지 택시를, 볼트는 우버 서비스처럼 현지인 차량을 타는 방식이다. 그랩은 차량 상태가 어느 정도는 균일했고 볼트는 복불복이었는데 정말 깨끗한 차도 있었고 반대로 상당히 오래되고 담배 냄새 가득한 차도 있었다.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우리의 첫 볼트는 매우 낡고 작았다. 트렁크에 짐이 다 안 들어가서 뒷좌석에도 짐을 실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주행 거리는 무려 34만 6천 킬로미터! 그동안 본 적 없는 숫자이다. 가속과 감속이 드라마틱하게 차이 나서 마치 전기차를 타는 것처럼 울컥 댔다. 가는 길에 주유소에 들러 주유를 했는데 주유 게이지가 고장 난 건지 처음부터 두 칸이었던 주유 레벨은 주유 후에도 똑같이 두 칸이었다. 기사님은 기름이 부족한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건 방콕의 교통체증이었다. 현지 시각으로 새벽 두 시인데도 막히는 길이 있었다. 정말이지 엄청난 양의 차와 오토바이가 도로에 있었고, 골목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공항에서 40분,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간단하게 씻고 푹신하고 큼직한 침대에 누웠다. 피로가 몰려왔지만 사실 피곤함보다 기대가 훨씬 더 컸다. 내일은 어떨까? 2년 만의 방콕은 또 얼마나 변해있을까? 우리 피치는 여기에서 무엇을 얼마나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까? 정말이지 길고 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