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위 만찬보다 소박한 골목 식탁

세 식구 태국 여행 이야기

by 피자치킨피치

어젯밤 새벽 세 시에 잠이 들었고 아침 아홉 시쯤 눈을 떴다. 여섯 시간 정도를 잤으니 잠이 그렇게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방콕은 우리나라보다 두 시간 느리다. 그러니까 방콕에서 아홉 시면 우리나라는 열한 시인 것이다. 나이 드니 아침잠이 없어져서 평소 소원이 늦잠 자는 것이었는데 이런 방식으로 소원을 하나 풀게 될 줄은 몰랐다. 비록 절대적인 잠의 양은 부족하지만 어쨌든.


우리 셋은 살짝 비몽사몽한 기분으로 숙소를 나와 물색해 둔 아침 식사 장소로 향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일부러 호텔 조식을 포함하지 않았다. 호텔 조식이 편리함과 맛, 위생은 보장할 수 있지만 지나고 보니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유럽, 남태평양 어디를 가도 매번 비슷했던 서구식 수프-샐러드-빵-소시지-계란요리들은 잊고 현지 문화에 더 녹아보자는 취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태국 여행 첫 끼를 현지인처럼 먹어보기로 했다. 의외로 뭉미가 먼저 제안했다. 구글 평점이 괜찮고 또 먹어본 사람들의 후기가 좋은 곳을 골랐다. 왕복 2차선 작은 골목가에 있는 야외 식당의 첫인상은 ’덥다, 덥다, 엄청나게 덥다’였다. 아직 아침이고 햇살을 가려주는 적절한 그늘이 있는데도 땀이 옷에 흠뻑 배어 나왔다. 위생 측면에서도 할 말이 있다. 앞사람이 이용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테이블 위를 물티슈로 닦자 까만 먼지가 묻어 나왔다. 새 물티슈를 꺼내 닦은 곳을 또 닦았더니 아직도 까만 먼지가 나왔다. 이건 하루 이틀 쌓인 먼지가 아닌데… 음, 먼지도 반찬으로 즐겨야 하는 그런 곳이군. 설상가상 주문한 음식은 뜨거운 국수와 오므라이스, 똠얌꿍 국수이다. 더운데 뜨겁고 맵고 짜고 찝찝하고 난리 났다 정말.


기대 30%, 걱정 70%의 마음으로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제일 먼저 뭉미가 주문한 국수가 나왔다. 뭉미와 피치가 동시에 내 눈을 바라보았고 나는 살짝 긴장된 마음으로 첫술을 떴다. ‘와… 맛있다, 맛있어 이거!’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의구심과 후회, 걱정이 한순간에 싹 사라졌다. 내가 쌍엄치를 치켜들자 뭉미와 피치도 곧바로 한술 뜨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게 우리는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들이키며 든든한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피치는 손수건으로 머리에 두건을 만들어 쓰고는 머리에서부터 줄줄 흐르는 땀을 이겨내는 투혼으로 국수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세 식구 모두 땀으로 샤워를 하다시피 했지만 음식을 맛있게 먹으니 그 땀조차 어찌나 상쾌하게 느껴지던지…


아침을 먹었으니 이제 놀아볼까? 물놀이를 정말 좋아하는 피치와 나는 호텔 수영장으로, 요가를 좋아하는 뭉미는 미리 신청해 둔 요가 클래스로 갔다. 수영장 깊이는 130cm로 키가 120cm인 피치에게는 조금 깊었다. 하지만 벌써 반 년째 수영을 배우고 있는 피치에게 이 정도 물 깊이는 큰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자유형, 배영, 평영, 그리고 접영까지! 피치는 깊은 물에서도 두려움 없이 종횡무진 수영장을 누볐다.


수영 후에는 호텔 근처의 원방콕을 구경하러 갔다. 무더위를 피해 시원하고 깨끗한 몰에서 식사도 하고 쇼핑도 즐겼다. 점심은 여기의 크루아 압손에서 먹었다. 카오산에 본점을 두고 있는 크루아 압손은 2018년부터 벌써 8년 연속 미슐랭 빕구르망 인증을 받고 있는 곳이다. 유명 메뉴인 껍질 없는 순살 뿌팟퐁커리도 좋았지만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메뉴는 바로 연근커리이다. 특유의 시고 달고 매운 그 맛이 마치 묵은지 김치찌개를 먹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굵고 단단한 연근이 아니라 얇고 고구마줄기 같은 식감의 연근은 연근이라고 알려주지 않으면 이게 연근인지 절대 모를 것 같은 형태와 색깔을 띠고 있었다. 바로 쌀밥을 하나 주문해서 게 눈 감추듯 흡입했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맛있었다.


원방콕을 포함한 방콕 쇼핑몰의 단점은 바로 높은 물가인데 특히 공산품의 가격은 같은 브랜드의 같은 제품도 서울보다 10~20% 정도는 더 비쌌다. 서울이 더 저렴하니까 굳이 지갑을 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 피치가 갖고 싶다고 노래 부르던 곰 인형과 손목시계는 못 이기는 척 사주었다. 여행 후 서울로 돌아가도 곰 인형과 시계가 이 날의 추억을 되새길 소중한 매개체가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버스토랑’이다. 버스와 레스토랑을 합쳐 만든 이색 체험으로, 코스 요리를 먹으면서 버스를 타고 방콕 시내를 관광하게 된다. MRT를 타고 버스토랑 출발지에 도착하자 시원한 웰컴 음료와 과자로 식전 코스가 시작되었다. 피치가 리치 음료를 너무 맛있게 마시길래 내 것도 양보해 주었다. 맛도 맛이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한몫했을 것이다. 하여튼 피치는 분위기를 매우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엄마처럼.


출발 시간이 되고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2층 버스인데 1층은 운전석과 준비 공간으로 활용되고 이용객은 모두 2층 좌석에 앉았다. 좌석은 익숙한 우등 버스의 2-1 배치가 기본인데 좌석 사이에 식탁을 놓아 4인석과 2인석을 구분해 놓았다. 정원은 대략 10~15명 정도이고 우리 포함 네 팀 정도가 있었는데 우리는 운 좋게도 시야가 가장 좋은 버스의 가장 앞쪽 자리로 안내받았다. 식탁 위에는 특수 제작한 블록 같은 구조물이 있어서 용도가 궁금했는데 나중에 보니 물컵과 와인잔 등을 끼워 넣는 용도였다. 차량 내 조명의 위치와 밝기, 서비스 공간과 승객 공간의 분리, 창문의 생김새와 높이까지 하나하나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보였다.


버스는 차이나타운과 왕궁, 카오산 옆 길 등 방콕의 올드 타운을 1시간 30분 동안 느긋하게 달렸다. 버스토랑을 여행 첫 날로 예약한 이유는 이번 여행 계획이 빡빡하지 않기 때문인데, 방콕의 올드타운을 버스를 타고 편안하게 둘러보며 어디가 가볼 만한지 살펴보자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저물어가는 해 때문에 초 단위로 바뀌는 바깥 분위기가 아름다웠다. 우리는 낯선 풍경 속에서 어느 하나라도 놓칠까 봐 ‘저기 좀 봐‘ 하며 소감을 나눴다. 특히 차이나타운 중심가를 지나갈 때에는 수많은 인파에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시원한 버스 안에서 편안하게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당장 저 틈에 끼어 함께 문화를 경험하고 싶은 충동이 함께 일었다.


음식은 예닐곱 가지가 나왔다. 먹을 때에는 하나같이 맛있다고 생각하며 먹었고 양도 많아서 배를 퉁퉁 두드리면서도 끝까지 먹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어떤 음식이 어떻게 맛있었는지 아주 인상 깊게 남진 않는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서 맥주와 망고, 수박, 람부탄을 잔뜩 샀다. 개운하게 씻고 앉아 하루를 정리해 본다. 정말 알차고 꽉 찬 하루였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의 가격 차이가 열 배 이상 났다. 저렴한 아침 식사와 제법 큰돈을 들인 저녁 식사, 그런데 값을 더 지불하는 것이 더 큰 만족을 주진 않았다. 버스토랑의 기억은 몇 개의 장면이 사진처럼 기억에 남을 뿐이었지만 거리에서 먹었던 아침 식사는 훨씬 더 많은 장면과 소리, 냄새와 음식 맛이 훨씬 더 선명하게 남는다. 그다지 깨끗하다고 할 수 없는 식탁, 엄청나게 흘렸던 땀, 그 찝찝함, 하지만 나중에는 상쾌했던 그 기분, 우리 식탁 주변에서 얼쩡거리던 이름 모를 까만 새들, 오토바이의 매연과, 웃옷을 벗고 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탱글탱글했던 어묵국수와 시큼 매콤한 똠얌국수, 고슬고슬하고 간이 딱 맞았던 볶음밥까지.


내일은 왕궁 투어가 있는 날이다. 많이 덥지 않아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