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식구 태국 여행 이야기
올해 1월부터 달리기를 다시 시작했다. 새해를 맞아 저질 체력을 강철 체력으로 탈바꿈하겠다거나 살 빼기에 성공하겠다는 그런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까운 사람들이 너도 나도 뛰니까 그냥 나도 뛰어봤고 그게 하루 이틀 쌓이다 보니 습관이 되었을 뿐이다. 누군가 버킷리스트를 물으면 막연하게 철인삼종경기 완주를 해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었으니, 이제라도 달리기에 취미를 붙인 것은 퍽 다행이었다. 완주, 목표는 딱 그만큼이었다. 나는 제법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어서 운동을 할 때에도 절대 무리하지 않는다. 딱히 기록을 단축시키고 싶은 욕심도 별로 없다. 어디까지나 ‘완주‘ 그 자체에만 목표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이번 달 목표가 100km 달리기라면 일주일 목표를 25km 달리기로 잡는다. 월요일에 10km를 뛰었다면 하루를 쉬고 수요일에 7km, 다시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8km를 달려 25km를 채우는 것이다. 큰 목표를 먼저 세우고 이를 잘게 쪼개어 작은 목표 여러 개를 퀘스트를 수행하듯 달성하다 보면 큰 목표도 비교적 쉽게 달성하곤 했다.
달리기는 다른 운동에 비해 실력이 금방 느는 운동이다. 물론 가파르게 올라가던 상승세는 얼마 가지 않아 큰 벽에 막힌다. 그래도 10km를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정도의 수준까지는 두세 달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 처음에는 1km를 뛰는 것도 힘들었다.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목표 거리를 차근차근 채워나갔다. 한 달쯤 지나니 아파트 단지를 쉬지 않고 한 바퀴 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나자 5km를, 다시 몇 주를 더 뛰니 10km 완주에 성공했다.
달리기에 취미를 붙이니 여행을 가면 꼭 그곳의 달리기 명소를 찾아 뛰었다. 그래서 숙소를 고를 때 ‘주변에 뛰기 좋은 곳이 있는가‘를 매우 중요하게 따졌다. 룸피니 공원과 벤짜낏띠 공원을 걸어서 갈 수 있는 몇 개의 후보지 중에서 수영장 상태와 건축 시기 등을 고려해서 최종 선택한 호텔이 바로 여기였다. 게다가 아무리 뭉미가 짐 간소화를 외쳐도 러닝화와 고글, 러닝 양말과 옷은 꼭 따로 챙겼다. 이렇게 숙소와 준비물에 내 입김을 많이 쏟았으니 조금 피곤해도 안 달릴 수가 없게 된다. 결국 이번에도 바쁜 여행 일정과 달콤한 아침 잠의 유혹을 이겨내고 미리 계획한 대로 두 공원을 한 번씩, 총 두 번 뛰었다.
첫 번째, 여행 3일 차에 룸피니 공원을 달렸다. 꿈꾸던 순간을 현실로 맞이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다. 뭉미와 피치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고양이 세수를 하고 어젯밤 미리 준비해 둔 운동복을 걸치고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입구에 들어가는 순간 새삼 녹지의 위대함과 중요성을 느꼈다. 마천루 속 작은 공원인데도 입구부터 체감 온도가 5도는 내려가는 것 같았다. 이른 아침 시간이었는데도 공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현지인은 물론이고 외국인도 정말 많았다. 달리는 사람들이 제일 많았고 걷는 사람들이 그다음, 그리고 태극권을 수련하는 사람들과 요가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가볍게 몸을 풀고 달리는 사람 틈에 합류했다. 와… 이거지! 생전 보지 못했던 풍경 속에서 시원한 숲 바람 맞으며 달리는 이 기분은 정말 말로 설명할 길이 없다. 황홀한 기분으로 단숨에 두 바퀴를 뛰었다. 평소보다 페이스도 제법 빨랐는데 더 뛰고 싶을 정도로 전혀 지치지 않았다. 아마 시간만 많았다면 그대로 두어 바퀴는 더 달렸을지도 모른다.
공원의 주로는 곧게 나 있지 않고 갈림길도 여럿 있었다. 복잡한 길 때문에 처음에는 여기가 어디인지 방향을 잃을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로 뛰는 길은 정해져 있어서 한 바퀴 돌자 쉽게 길을 익힐 수 있었다. 공원에는 고양이, 강아지, 이름 모를 새 외에도 도마뱀이 많이 있었다. 도마뱀 크기가 악어처럼 커서 처음 봤을 때에는 흠칫 놀랐다. 긴 혀를 뱀처럼 날름거리며 호수를 유유자적 수영하고 잔디밭을 어기적어기적 기어 다니는 도마뱀을 보니 조금 무서웠다. 물리면 다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런 사고가 종종 발생하는지 여기저기 안내판에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는 경고가 적혀 있었다.
룸피니 공원은 요가 좋아하는 뭉미도, 고양이를 사랑하는 피치도 분명히 좋아할 것 같았다. 오늘은 바쁜 일정이 될 것 같아 내일이라도 꼭 같이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호텔로 아쉬운 걸음을 옮겼다.
다음 날인 여행 4일 차 아침에는 벤짜낏띠 공원을 달렸다. 숙소에서 공원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걸렸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기대에 부풀어서인지 별로 고되진 않았다. 다만 왕복 8차선의 대로, 그것도 차와 오토바이가 무질서하게 쌩쌩 달리는 그 길을 횡단보도 없이 건너는 경험은 정말 끔찍했다. 그냥 걸으면 알아서 피해 간다고들 하는데 경험이 부족한 나로서는 그게 결코 쉽지 않았다.
벤짜낏띠는 룸피니보다 훨씬 더 크고 더 잘 정비된 공원이었다. 인공 호수를 따라 곧게 조성되어 있는 달리기 트랙이 메인이고, 아름드리나무와 꽃, 정원 사이로 구불구불 난 길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두 길은 각자 장단점이 있다. 메인 트랙은 뛰는 사람들이 많아서 달리기 그 자체에 집중하기 좋았다. 눈이 뻥 뚫리는 호수와 분수를 바라보는 맛도 있다. 하지만 더웠다. 그늘도 별로 없었고 아스팔트의 지글지글한 열감도 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한 바퀴만 뛰어도 체력 소모가 심했다.
반대로 정원 사잇길은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라 페이스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힘들었다. 워낙 좁아 사람 한두 명만 있어도 부딪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다. 하지만 시원했다. 아름드리나무 사이를 걸을 때에는 잠시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익숙한 꽃과 처음 보는 꽃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정원길을 고르겠다. 달리는 이유가 훈련과 정진이 아닌 체험과 재미이기에.
방콕 두 공원을 달리며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 마주 오는 사람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가볍게 눈인사나 손 인사를 주고받는 장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 생경한 예의가 내게도 전염되어 자연스럽게 내가 먼저 상대에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또 남녀노소를 떠나 옷차림이 지나치게 가볍든, 웃옷을 벗고 달리든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무더운 날씨에 나도 웃옷을 훌렁 벗어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으나 실천에 옮기진 못했다. 아무래도 동방예의지국 사람인지라 태국 정서에는 아직 적응하지 못했나 보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이것도 아쉽다. 할까 말까 할 때에는 하는 게 맞는 건데…
여행을 하며 얻은 작은 진리가 있다. ‘할까 말까 할 때에는 하자‘, ’갖고 싶은 것이 보이면 사자‘, ’구글 평점에 의존하지 말자’ 지금 글을 쓰는 순간에도 후회가 밀려온다. 그들처럼 상의를 벗고 땀범벅이 되도록 뛰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범법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며 나만 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는 많이들 그러고 있고 당연히 그래도 되는 곳인데. 수영할 때 수영복을 입는 것처럼. 서울 모처에서 볼 수 있는 베이징 비키니와는 다른 건데.
사실은 그런 마음의 연장으로, 꼬따오 사이리비치를 달릴 때에는 웃옷을 벗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질 꼬따오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