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식구 태국 여행 이야기
새벽같이 일어나 룸피니 공원을 달렸다. 낯선 여행지를 달리니 온몸이 땀으로 젖어도 상쾌했다. 누가 그랬다. 요즘에는 진짜 우리나라가 동남아보다 더 덥다고. 정말 그랬다. 서울에서는 해뜨기 전 꼭두새벽쯤 돼야 시원하게 뛸 수 있었는데…
일부러 요란하게 호텔로 들어와 뭉미와 피치의 아침잠을 깨우고, 어제 사둔 과일과 컵라면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매번 호텔 조식이 당연했는데 이렇게 차려 먹으니 그냥 휴일에 집에서 밥 먹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식사 후 수영장에 해가 들기 전에 야무지게 호텔 수영을 즐겼다. 워낙 물을 좋아하는 나와 피치는 수영을 통해 오히려 피로를 회복한다. 사실 수영이라기보다는 물놀이에 가깝다. 반면 물과는 상극인 뭉미는 혼자만의 요가 수련을 즐겼다. 피치가 좀 크니 예전과 다르게 우리 셋은 여행지에서도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따로 또 같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혼자 달리기를, 뭉미는 혼자 요가를. 정말이지 감개가 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점심 식사는 계획에 없던 곳으로 갔다. 첫날 아침에 먹었던 골목 현지 식당의 맞은편 ‘툭팍‘이라는 곳이다. 별생각 없이 거리를 두리번거리다 가게를 꽉 채운 사람들이 보였고 그냥 홀린 듯 들어갔다. 원래 식당을 찾을 때에는 구글 지도를 켜고 평점을 확인하고 리뷰를 몇 개 읽어본 뒤 최종 결정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음식 맛은 훌륭했고 가게 직원들은 친절했다. 특히 소면과 채소를 곁들여 먹는 코코넛 커리는 생소한 음식이었지만 내 입맛에 딱 맞았다. 코코넛의 달콤한 감칠맛과 커리의 매콤한 듯 진득하게 입을 감싸는 향기가 정말 인상적이었고 한입 한입 줄어드는 게 아까울 정도로 아주 맛있게 먹었다.
오늘 여행의 메인 코스는 바로 왕궁 투어이다. 지난번 방콕 여행에서는 남들 다 가는 카오산, 왕궁, 야시장을 근처에도 가지 않았었다. ‘클리셰를 깨뜨리자’는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고 그저 방콕의 즐길 거리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번만큼은 왕궁 정도는 가봐야 하지 않겠냐며 야심 차게 미리 예약해 둔 왕궁 투어. 그러나 많은 여행 후기에서 남겼던 경고를 과감히 무시하고 해가 한창 뜨거운 오후 2시를 고른 것은 큰 패착이었다.
날은 더웠고 해는 자비 없이 쨍쨍했다. 왕궁 입구에서 표를 끊을 때부터 온몸에 땀이 흘렀다. 내 몸 하나 건사하면 되는 여행이 아니니 마음은 두 배로 심란했다. 아내와 피치의 눈치를 살피며 동시에 가이드님의 설명에도 집중해야 했다. 왕궁 내 사람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 자칫 일행을 놓칠까 한순간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와중에 가이드님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시는 것까지는 정말 좋았으나, 말끝마다 ‘이거 진짜 금이에요‘, ’금종이를 손으로 하나하나 붙인 거예요’, ‘비싼 입장료가 다 이유가 있어요’를 남발했다. 결국 왕궁 투어 이후에 머릿속에 남은 것은 딱 세 가지, 다양한 포즈와 배경으로 셋이 함께 나온 가족사진, 왕궁의 비싼 입장료와 개당 2천 원의 진짜 금종이를 붙였다는 사실, 그리고 ‘킹파워 마하나콘과 킹파워 면세점‘이 왕족의 사업이라는 것이다. 셋 다 우리끼리의 투어였다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것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이드님께 기대했던 것은 방콕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살아있는 정보였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분들께 분명히 경고한다. 왕궁 투어는 아침 일찍, 또는 저녁 늦게 하시라고.
왕궁 투어 이후에는 사실 야시장을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체력이 달려서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마침 가이드께서 왕궁에서 배를 타면 교통체증 없이 바로 아이콘 시암을 갈 수 있다고 했다. 계획에 없던 곳이지만 갑자기 힘이 났다. 망설임 없이 가장 빨리 오는 배를 잡아탔다.
지난번 방콕에 온 것은 2년 반 전이었다. 아이콘 시암이 너무 좋아서 두 번이나 갔었다. 해질녘 짜오프라야 강 풍경을 즐기는 유람선도 탔었는데 그 유람선 선착장에서 찍은 뭉미와 피치 사진이 그때 방콕 여행 앨범의 메인 사진으로 쓰였다. 아이콘 시암에 도착하자마자 얼른 그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2년 반 전과 같은 구도와 포즈로 사진을 남겼다. 뭉미와 피치에게는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 사진이 큰 울림을 주었다. 큼직한 두 명품 브랜드의 간판까지 여전히 그대로인 아이콘 시암, 긴 머리를 단발로 자른 여전히 사랑스러운 뭉미, 키가 한 뼘은 더 자랐고 아기에서 어린이로 거듭난 피치.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울컥했는데 무더위는 감정보다 더 센 놈이라 금방 사그라들고 말았다.
아이콘 시암 지하에 있는 쑥 시암으로 갔다. 두리안과 지난번엔 못 먹었던 카오카무(족발덮밥), 무삥(돼지꼬치구이)을 주문했다. 두리안은 악명이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맛있었다. 냄새도 뭐 이 정도면 역하다고 하기도 어렵지 않나. 취두부 냄새를 못 맡아봐서 그렇지. 피치는 쌀국수를 시켰는데 입맛에 아주 잘 맞진 않았나 보다. 뭐라도 배를 채우게 해야 할 것 같아 탕후루를 사주었다. 한국에선 절대 못 먹었을 탕후루를 입에 넣으며 피치는 아빠 엄마가 방콕에서는 너그럽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루 종일 흘린 땀을 시원한 창 맥주 한 잔으로 보충하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호텔로 돌아와 땀에 전 옷을 세탁기에 넣으며 오늘 하루의 고됨을 실감했다. 아이콘 시암에서 찍은 사진, 그리고 왕궁에서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찍은 사진을 떠올린다.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다시 그 장소에서 같은 포즈를 하고 찍을 날을 고대해 본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며 예전 같지 않은 내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기에 사진에 담기는 걸 조금씩 꺼리게 되었었다. 그렇지만 오늘의 내가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가장 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내일은 조금은 더 적극적으로 우리 모습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하며, 밤 수영을 하자는 피치의 의견에 따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수영장으로 간다. 내일은 미슐랭 레스토랑과 도심 속 백화점을 구경하는 날이다. 많이 걸어야겠지만 오늘처럼 덥진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