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투명사회>
끊임없는 자기pr, 자기계발, 자기경영, 브랜딩이 강요되는 오늘날 관심interest은 곧 이익interest이 된다. 가시화되어 드러나지 않은 것에는 의미가 없으며, 모든 것은 오직 보이는 한에서만 가치를 획득한다. 이렇듯 사물들이 모두 상품화되어 전시되지 않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는 현 디지털 사회에서 제의가치는 전시가치에 밀려 사라지고 만다. 이러한 성과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자기 안에 조용히 간직하고만 있는 것은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까발려지지 않은 모든 것은 '없음'으로 인식된다.
자본주의 경제 하에서 모든 것은 전시가치로 측정되고, 전시의 강제 아래 복속된다. 모든 것이 겉으로 표현되고, 까발리고 노출되는 전시적 연출로써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이에 따라 모든 주체는 스스로를 광고의 대상으로 삼는다. 과도의 전시의 결과로 모든 것은 어떠한 비밀도 없이 즉각적인 소비에 내맡겨진 상품으로 전락한다.
바깥에서는 카페에 의해 사람들이 전시되는 것처럼 보였는데 막상 안에 들어오자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나 스스로가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이 공간이 가진 포식성에 놀라고 말았다. 내가 여기서 뭘 하든 상관없이 그것은 매 순간 이 공간에 대한 광고이자 상품 자체가 되고 만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이 공간은 그것들을 먹성 좋게 먹어치운 다음 이미지화하여 라이프스타일 상품으로 가공하여 배설한다. (...) 거기에선 모든 것이 풍경이고, 모든 것이 작품이며, 모든 것이 디자인이고,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상품이다. 모든 것은 팔려나가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러니까 그곳이 자신을 복합 문화공간으로 설명하는 것과 다르게 거기에는 문화가 없다.
/김사과 <0 이하의 날들>
롤랑 바르트는 사적 영역을 "내가 어떤 이미지도, 어떤 대상도 되지 않는 시공간의 영역"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정보화 사회 내에서 사적 영역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내가 이미지가 되지 않는 영역, 카메라가 존재하지 않는 영역은 없기 때문이다. 구글 글래스는 인간의 눈 자체를 카메라로 만든다./p.117 이미지에 대한 강박, 나아가 이미지 그 자체가 되라는 강압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개인의 내밀한 사적 영역은 완전히 철폐되고 끝없이 밀려난다.
이러한 전시적 강제는 그 상황 자체에 현존하고, 머무르는 것을 방해한다. 육체는 최적화시켜야 할 전시 대상으로서 사물화되고, 이에 따라 그 속에 편안히 거주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세계 자체가 전시 공간이 되어버린 디지털 사회는 이미 오프라인의 현실 그 자체를 대체하였으며, 온전한 현존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렇다면 진실 속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 또한 저자와 같이 부정성의 힘에 동의하는 편이다.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살며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생각한다. 의도치 않건 의도했든 간에 군중 앞에서의 모든 행동은 이미지화되며 전시화된다.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나를 관찰하는 눈에 어느 정도 자신을 맞추게 된다. 그 순간의 나는 100% 온전한 진실로 존재할 수 없다.
이 책을 읽던 중 문득 생각난 추억이 있다. 몇 년 전, 나에겐 특별한 노래가 있었다. 좋아하던 애와 관련된 추억이 얽힌 노래였다. 들을 때마다 그 애 생각이 났다. 그 노래에 부여된 특별한 기억으로 인해서 노래와 나를 연결하는 긴밀한 관계가 존재했다. 서툴렀던 나는 사랑에 빠져 과잉된 오락가락한 감정을 어디에든 알리고 싶었다. 그렇게 에쎈에스에 그 노래를 캡쳐해 올렸다. (가사는 누가 봐도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내용..;으엑 이불킥) 그 후 다음번에 그 노래를 들었는데, 왜일까 더 이상 기존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노래에 빠져 집중할 수 없게 됐다. SNS에 올린 순간부터 다른 사람의 눈길이 개입됐고, 노래와 나를 잇는 내밀한 가치가 파괴된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가 다른 사람의 눈으로 그 노래를 보게 됐다. 단 한 명의 눈길만으로도 모든 게 깨져버린 기분이었다. 그때의 경험을 통해 정말로 지키고 싶고 소중한 것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간직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 붙들린 고유한 감정, 느낌과 가치를 깨지 않기 위해서.
이러한 부조리를 인식하면서도 또 전시와 관찰을 끊을 수도 없어 인스타그램을 계속해서 들락날락거리고, 지금 이렇게 브런치에 주저리 뭔가를 쓰고 있는 스스로가 참 모순적이란 생각이 자주 든다. 반면 가까운 친구들을 보면 SNS를 안 하는 애들이 많다.(태그하고 싶은데…) 신기하고 궁금해서 몇 번 물었다. “넌 왜 인스타 안 해?” 친구가 말하기를 가깝지도 않은 사람에게 내 일상을 보여주는 것이 꺼려지기도 하고 귀찮다 했다. 음.. 그것도 어느 정도 공감이 됐다. 무의식적으로 스크롤을 휙휙 내리며 SNS에 붓는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그래서 나 또한 한번 모든 에쎈에스를 끊으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어플도 삭제하고, 그래도 한 1년간은 유지했었다. 근데 그러다 또 마음이 바뀌어서 인스타를 다시 하고 있다. 그래도 일을 시작하고나서부턴 학생 때보다 SNS를 붙잡고 있는 시간이 줄긴 했다. 거리를 두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그치만 앞으로 아예 끊을 순 없을 것 같다. 디지털 사회의 전시에 몸을 담근 순간부터, 그로부터의 탈주는 항상 불완전하며 실패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전시 사회에 잠식당하던지, 혹은 탈주에 성공하여 존재 자체가 잊히던지 어느 쪽이나 두렵고 공허한 것은 매한가지다.
ps. 얼마있어 최근 출시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따끈한 신작 <소셜 딜레마>를 봤다. 구글, 유튜브,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거대 플랫폼 기업들이 축적한 빅데이터로 단지 이익창출만을 위해 개개인의 정신을 어떻게 조작하고 지배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다큐 영화였다. 책이 던져준 생각거리의 연장선이기도 했고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웃긴건 Sns의 이면을 고발하는 이 영화를 왓챠피디아로부터 알게 됐다는 것이다. 나와 취향 매칭률이 83%인 팔로워의 4.5라는 높은 평가를 받은 영화였고, 왓챠가 예측한 나의 예상 점수 또한 3.9로 높았다. 영화를 본 후 나는 4.5점을 기록했다. 이러한 평가를 통해 또 다시 빅데이터에 기여하는 무한 아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