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인드 육아 스토리1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by 사량


얼마 전, 지인에게서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제목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이 책에 대해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이 제목을 보는 순간, 내 삶 속에서 영혼이 따뜻했던 순간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 시절의 기억을 따라가며, 그때 왜 그렇게 따뜻했는지 기록해두고 싶어졌다.


가장 먼저 떠오른 장면은 오늘처럼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던 어느 봄날의 기억이다. 우리 집은 대형마트 바로 옆에 있다. 그날도 막내아들과 함께 마트에서 간식을 사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이는 유아기였고,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때 내가 공부 중이었으니 아마 일곱 살 쯤이었을 것이다.


바람은 우산을 여지없이 뒤집었고, 우리는 우산을 바로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바람은 우리의 저항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 거세게 몰아쳤다. 결국 우리는 그냥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우산 밖으로 삐져나온 손은 촉촉하게 젖었고, 중심을 잃은 몸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가까스로 아파트 단지 입구를 지나 놀이터까지 왔다.


놀이터 한쪽, 바람을 막아주는 휴식 공간에서 우리는 잠시 멈춰 섰다. 마주 본 순간,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배꼽이 튀어나올까 봐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우산을 짚으며 한참을 깔깔 웃었다. 몇 분 뒤 비는 멎었다. 우리는 지붕이 덮인 넓은 나무 그네에 나란히 앉아 잔잔히 흔들렸다. 젖지 않은 그네는 아늑했고, 흔들림은 마음까지 편안하게 했다.


그 순간, 설명하기 힘든 뭉클한 감정이 일었다. 아들과 내가 같은 상황에서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며 함께 웃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좋았다. 우리는 서로를 깊이 느낀 것 같았다. 그날, 나는 분명히 느꼈다. “내 영혼이 참 따뜻했었다.”


지금 그 막내는 어느새 중학생이 되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 참 고맙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자꾸만 아쉬움이 맴돈다. 언젠가 대학생이 되어 품을 떠날 아이니까. 그래서 지금 이 시간, 같은 지붕 아래 함께할 수 있는 동안 소소한 추억을 더 많이 쌓고 싶다. 그렇게 다짐해 본다.


두 번째 따뜻한 기억은 나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살던 집은 일본식 주택이었다. 마당은 넓지 않았지만 길게 뻗어 있었고, 잔디밭으로 가는 길엔 작고 앙증맞은 연못이 하나 있었다. 한때는 금붕어가 유유히 헤엄쳤지만, 초등학교 2학년쯤부터는 보이지 않았던 기억이다. 마당가엔 붉은 맨드라미가 닭 볏처럼 피어 있었고, 봉숭아로 손톱을 물들이며 분홍이 예쁜지 빨강이 예쁜지 서로 겨루기도 했다.


왼편에는 알이 알차게 박힌 커다란 석류가 달린 나무도 있었다. 단층집이었지만 두 가족이 살았고, 마당 끝을 돌아 안쪽 집에는 할머니가 홀로 지내셨다. 우리 자매가 찾아가면 늘 전병 과자, 젤리, 호두 같은 군것질거리를 내어주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새로운 친구가 전학을 왔고, 내 짝이 되었다. 그런데 처음엔 이상한 냄새가 나고, 얼굴도 어두운 느낌에 내가 보기엔 못생겨 보였다. 말라붙은 몸과 냄새, 그것들이 싫었다. 어느 날 국민체조 시간에 그 아이는 체조 대신 책상 사이에 손을 짚고 철봉 하듯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순간, 못마땅한 감정이 폭발했고,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했다. 아이를 양손으로 밀어버린 것이다.


기억 속 그 아이는 피를 흘렸고, 나중에 들으니 앞니 두 개가 깨졌다고 했다. 며칠 후, 그 아이의 부모님이 집에 찾아왔다. 대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돌아가는 순간까지, 나는 나의 부모님께 호되게 혼날까 봐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엄마와 아빠는 나를 꾸짖지 않으셨다. 차분한 목소리로 “왜 그랬니?” 하고 물으시고,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마”라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 순간, 나는 부모님의 얼굴과 어깨너머로 어딘가 빛나는 하얀빛을 본 것 같았다. 따뜻했고, 든든했다. 부모님의 그 온기가, 내 영혼을 데워주었다. 지금도 또렷하게 느껴진다.


이런 순간들이 바로,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었다.

자녀의 실수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고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게 타이르시던 부모님의 차분한 대처가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를 더 따뜻하고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아이들을 육아하고 현장에서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나는 항상 아이편에서 해석하려고 한다. 잘못된 행동은 고쳐야 하지만 아이 그 자체는 자신의 존재를 수치스러워 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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