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현우 Jul 26. 2021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영화 사운드 오브 메탈(2019)

영화 사운드 오브 메탈의 시작은 일단 이렇다. 청력을 잃어가는 드러머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드러머의 관점 보다는 청각과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에 집중한 영화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내가 기대한 이야기와 다른 길을 택하지만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영화를 보다 '시간은 계속 흐른다'는 어찌보면 매우 상투적인 표현이 떠올랐다. 영화를 보는 중 똑같은 대사가 흘러나왔다. 사람 생각하는 건 다 같구나 싶었다. 사운드 오브 메탈은 사실 본인의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이 글은 영화 사운드 오브 메탈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사운드 오브 메탈은 철의 소리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주인공 루빈은 헤비메탈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2인조 그룹의 드러머이다. 보컬은 그의 여자친구, 루이며, 루는 루빈의 피폐한 과거로부터 구해준 히로인이다. 과거의 약물중독 후유증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청력을 잃어버린 주인공은 으레 사람들이 겪을법한 과정을 겪는다. 슬픔의 다섯 단계 중 첫 단계는 부정이다. 루빈은 지속적으로 탈출할 방법을 모색한다. 다시금 청력을 되돌릴 방도를 찾는다. 그러던 중, 청각장애인들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사회와 단절되어 지내게 된다.


루빈은 과거 약물중독자였던 때를 두려워한다. 루는 그 구렁텅이에서 루빈을 꺼낸 영웅이다. 루빈에게 루는 인생의 전부다. 루와 함께 전국을 돌며 투어를 도는 일상의 그에겐 천국이었다. 그런 그에게, 연주를 하지 못하고 투어를 이어나가지 못한다는 것은 그에게 악몽의 실현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루와 투어를 돌던 때로 돌아가기 위해 애쓴다. 그 방법은 바로 수술을 하는 것인데, 큰 비용이 따를 뿐더러, 성공 확률도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에게 그런 변수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이 생각에서 벗어나는 때가 있는데, 바로 공동체에서 청각장애인들과 생활할 때다.


그는 친구를 사귀고, 수업에 나가며, 주어진 활동을 한다. 공동체의 수장 조는 문제가 있으면 고쳐나가려는 루빈을 보고선 자신의 서재에 홀로 앉아 무엇이던 좋으니 글을 쓰라는 활동을 받는다.  루빈은 서서히 공동체에 동화되어 즐거운 시간들을 보낸다. 그래서 조는 루빈에게 공동체에 남아 계속 생활하기를 권하지만 루빈은 결국 수술을 택한다. 수술을 하고 돌아온 루빈은 조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다. 이때 조는 '혹시 아침마다 서재에 앉아있으면서 그런 적이 있었는지 궁금하구나. 혹시 고요함을 느껴본 적이 있니? 세상은 쉼없이 흘러가는 잔인한 곳이지만 그 고요한 순간이 나에겐 하느님의 나라야.'



조는 알고 있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흘러간 영광의 과거는 말 그대로 과거이고 본인이 살아가는 현재와 현상황이 낙원이라는 것. 귀를 잃고도 공기가 찢어지는 굉음 속에서 살아가던 루빈은 결국 본인의 삶에서 도망가버린다. 조는 청각장애를 잘못된 것이 아니고, 고쳐야 하는 무언가가 아닌 본인의 인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루빈을 보내며 울먹인다. 무지개빛으로 가득한 판타지 월드가 아니라 현실을 사랑하길 바란 조는 사실, 매일매일을 싸우며 버티어 내고 있던 것이다. 본인을 사랑하기 위해 매일 매일 간신히 이어나가고 있는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루빈의 선택은 그들의 믿음을 거스르는 행위였다. 완벽하지 않고 삐뚤빼뚤한 본인의 인생을 그 자체로 사랑하겠다는 믿음말이다.


루빈은 루와 함께 다시 투어를 돌기 위해, 음악 장비와 캠핑카를 판다. 과거를 위해 현재를 팔아버리는 루의 행동은 과거, 마약중독자 였을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현실을 도피하고 눈을 돌려버린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에서 도망치는 일이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루빈은 본인의 삶을 사랑하지 못했다. 청력은 고요함을 담아내지 못한다. 이 모순은 그의 삶에도 적용된다. 그는 본인에게 돌아왔어야 했다. 본인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본인에게서 찾았어야 했던 것이다. 루빈은 잠들어 있는 루를 두고 밖으로 향한다. 루빈은 본인의 삶을 사랑할 수 있을까?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지만, 그래도 응원하고 싶다.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수술이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이 아니다. 본인의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볼테르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있는 곳이 낙원이라.' 루빈은 청력을 잃어서야 본인에게 돌아 갈 수 있게 되었다. 매일을 듣고 싶어하는 소리와 듣고 싶지 않은 소음과 함께 살아가는 축복 속에서 가끔 찾아오는 고요함은 희귀한 것이다. 매일을 고요함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청력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인가? 나는 이 말에 반대한다. '좋은 때였지'라고 회상하기 이전에 좋은 때라고 상기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루빈이 작중에서 가장 행복하게 보였던 때를 생각해 보았다. 헤비메탈이 귓속을 때릴 때도, 수술을 받았을 때도, 루의 이메일을 읽을 때도 아니었다. 고요함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던 그의 모습이 가장 행복해 보였다.










작가의 이전글 각자의 전쟁을 치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