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스파이크 존즈, 각본 찰리 카프만
어댑테이션의 시작은 이러하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그 핵심은 적응이다. 단세포에서 시작해 두 발로 걷는 영장류로 오기까지 셀 수도 없이 천문학적인 횟수의 적응을 거치고 나서야 지금 나의 모국에서 우리 민족의 언어로 이 감상문을 타이핑해 내려가고 있는 것일 것이다. 찰리와 도널드는 쌍둥이다. 처음엔 도널드가 찰리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싶었다. 유령과도 같이 찰리를 따라 나타나면서 찰리를 계속해서 자극시켜 주는. 그 자극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말이다. 찰리와 도널드를 비교했을 때 도널드는 찰리와 같은 생김새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현대 사회의 자본주의와 같은 사람들의 인식에 맞서 새로운 자신으로 거듭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때 사랑에 빠졌던 여자에게 말을 걸고선 뒤에서 자신을 비웃는 소리에 찰리는 적응하기를, 도널드는 그 사실에 적응하지 않기를 임했다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안식을 위해 적응한 것이 아니라 본인을 사랑하고 아끼기 위해 적응이 아닌 변화하기를 택했다는 말이다. 남들의 생각과 말은 내가 바꾸어 낼 수 없다. 매우 안타깝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지구 본연의 의미와도 같이 느껴지는 그 말은 상상이 되지 않으리만치 거대하고 딱딱하게 느껴진다. 그 안에서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는 영혼은 지구상에 없으리라 장담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나인채로 살아가야 하고 결국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용기를 내면? 인생이 바뀐다. 내가 세상을 바꿀순 없을 테지만 내가 바뀐다면 더 이상 세상은 예전의 세상이 아닐 것이다. 찰리는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잃고 나서야 그 단순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진리에 가닿게 되었다.
반면 수잔의 적응은 흔하디 흔한 미물의 볼품없는 적응에 그친다. 인간의 추악한 면모는 합리화에서 드러난다. 그 합리화는 수잔의 적응에 따른다. 수잔의 적응은 자신의 삶에 해악하다. 파괴적이다. 그녀가 유령난초를 보고 나서 한 말이 있다. 라로쉬와 함께 그토록 꿈에 그리고 거듭해서 상상한 오아시스와도 같은 그 꽃을 본 순간 그녀는 그냥 꽃이네요 하고 말한다. 그토록 갈망하고 인생에서 처음으로 열정을 가져본 그녀이지만 무지개의 끝에 가닿은 그녀의 한마디는 반면, 그렇게 충격적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왜일까? 나의 생각은 그녀가 겪은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우리의 인생사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찰리도 처음엔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인생은 실망스럽지 않나? 극복이 엔딩이 아니지 않느냐 이말이다.)
기대하면 실망이 따르는 법. 마치 유령난초에 대한 수잔의 감정이나 라로쉬의 가족사처럼. 인생은 기쁨보단 기대뒤의 절망감에 초점을 둔다. 우리는 왜 이것을 진리로 알고 있을까? 우리는 짧던 길던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기대와 그보다 더 많은 실망을 경험하면서 살아왔다. 내가 좋아하는 저 애한테 고백했을 때를 끊임없이 상상하다 결국 상처와 트라우마를 경험하거나 열심히 공부한 것에 비해 성적이 형편없다던가 내가 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상상한 기대와 달리 현실은 냉혹하기 그지없을 때를 우리는 아침에 밥 먹듯이 외출하기 전에 신발을 신 듯이, 아주 일상적으로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들을 겪으며 제정신이 아닌채로 살아가다 보면 재능을 가지고도 가능성을 가지고도 자기혐오에 빠지기 십상이다. 바로 찰리처럼 말이다. 찰리가 묻는다. 인생은 무미건조하고 변화도 없고 새로움도 없지 않느냐. 맥킨은 크게 화를 내며 대답한다. 인생은 변화와 비극 기쁨과 기적 슬픔과 행복으로 가득차있다. 지금 이 순간 지구 어딘가에서도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이다.
찰리는 도널드처럼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더욱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찰리는 자신의 분신을 잃고 나서야 용기를 냈다. 가슴이 미어지는 실패와 좌절, 그 뒤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자신이 혐오했던 사람의 강의를 듣고, 쌍둥이 동생의 맘에 들지 않던 행보를 응원하고, 두려움의 순간에 본인이 직접 일어나 걸어가는 그 짧고 빛나는, 찰나의 순간과도 같은, 인생의 소소한 기적들을 위해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찰리는 그 슬픔에 적응하지 않기를 택했다. 마치 도널드가 앞서 고등학생때 다짐했던 것처럼. 스스로를 혐오하길 그만두고 한 발짝 앞으로 발을 내딛는, 태초에 생명의 시작점에서 그들이 해왔던 적응과 비등하게 대단한 것을 말이다. 적응보다 위대한 변화를 위해서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 실망을 수없이 몸으로 헤쳐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유령난초를 발견하는 순간이 오면 자신의 상상과는 달라서 실망스러운 실물의 난초를 뒤틀어내서 또다시 실망감에 적응해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있는 그대로의 난초를 사랑할 용기를 기꺼이 마음에 품을 것인지는 자신에게 달려있다.
결국 이 영화는 지금껏 자기혐오와 자기멸시에 철저히 적응해왔던 한 루저가 새로이 변모해나가는 것에 관한 영화다. 찰리는 수잔이 쓴 책의 엔딩을 마음에 들어했지만 역설적으로 본인의 엔딩은 정반대의 형식으로 끝났다.
그리고 나는 찰리의 엔딩이 마음에 든다.
그나저나 카프만은 이 영화에서 만큼은 천재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가 지나쳐왔을 그 골머리 앓는 밤들을 생각하니 벌써 무기력증에 빠질 것만 같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이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 고뇌와 역경의 날들. 난 알아 그 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