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서적과 자기 계발서에 빠져 살던 남편이,
어느 날부터인가 '일하지 않고 사는 삶'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가 설명하는 시스템은 인생의 효율을 극대화해 줄 것처럼 들렸다. 그래도 어쩐지 그것이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요즘 서점에 가면 ‘적게 일하고 돈을 버는 이야기’,
심지어 ‘일하지 않고도’ 부를 이룰 수 있다며 ‘부의 파이프’를 구축하라고 부추기는 책이 넘쳐난다.
‘돈이 나 대신 일하게 하라’는 문장은
어느 순간 전략이 아닌 시대정신이 되었고,
이 대열에 끼지 못하면 뒤처지는 것만 같다.
이 말에 반감이 드는 것은, 내가 반골 이어서일까?
그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나 역시 가르치는 일을 하며, 내 시간을 쪼개 글을 쓰고,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고자 애쓴다.
언젠가 이 글들이 자산이 되어,
내가 쓴 문장들이 미래의 수익을 가져다주길 바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니 나 역시 이 대열 속에 있다.
‘자산소득’이라는 말을 알기 전에도,
나는 늘 일 앞에서 계산부터 했다.
‘이 일이 시간당 환원되는 돈의 가치는?’
‘아니면 미래의 자산적 가치는?’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서 의문과 질문이 떠오른다.
‘왜 나는 당장의 수익이 없어도 글을 쓰고 있을까?’
‘왜 가르치고, 듣고, 누군가의 감정을 받아내는 일을
그저 생산성의 대가로만 환원할 수 없는 걸까?’
그 의문과 질문은 결국 하나의 근본적인 물음으로 수렴된다.
‘부의 파이프’!
참 매력적인 말이다.
시간과 돈을 직접 교환하지 않아도,
한 번 만들어두면 스스로 작동해 수익을 만들어낸다니!
유튜브 영상 하나, 전자책 한 권, 온라인 강의 한 편이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을 만나고 수익을 만든다.
그러나 이 흐름 속에서 종종 잊히는 것이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삶을 위해 행해지는 살아 있는 노동의 가치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한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반복적 행위이며,
작업은 세계를 남기기 위한 생산 활동이고,
행위는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을 드러내는 실존적 활동이다.
이 구분은 노동이 가장 낮은 위치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렌트가 말하려 한 것은,
삶을 지탱하는 노동이 결코 비인간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노동을 통해 인간은 타인의 세계에 관여하고,
더 나은 나아갈 가능성을 연다는 것이다.
리처드 세넷은 『장인』에서
“잘하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 존재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인정신’을 단순한 기술력이 아니라,
일에 대한 자부심과 도덕적 실천의 태도로 보았다.
나는 글을 쓰면서,
아이들에게 지식과 그 접근법을 전승하며
미래의 가능성과 자의식을 느낀다.
나의 노동이 정당한 수익을 가져다줄지는 미지수지만,
그보다 먼저 내 존재를 증명하고,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통로가 된다.
물론 이 노동들이 자산이 되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이 글들이 나를 대신해 일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 이 순간 이 문장들을 쓰기 위해 쏟은
시간과 에너지가 정당하게 인정받기를 바란다.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시대.
나는 여전히 일하고 싶다.
그 일이 내 삶을 지탱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부의 파이프’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개념이 마치 노동의 가치를 무효한 것처럼
무분별하게 소비될 때,
그 속에 숨은 불평등의 구조를 읽어야 한다.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자산이 자산을 낳고, 자본이 자본을 증식할 때 노동자는 상대적 빈곤 속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불균형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죽는 날까지 일하고 싶다.
수익보다 존재로서의 지속 가능성을 지키며,
그것이 가능한 사회 속 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 인간 활동의 본질에 대한 사유
• 리처드 세넷, 『장인』 – 노동의 윤리적 의미
•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 자산 vs 노동의 불평등 구조
•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 직업과 자아에 대한 사유
• 브루스 후드, 『부의 인문학』 – 소유와 부에 대한 심리학적 통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