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숫자를 끝까지 세어보고 싶었다.
억, 조, 경… 교과서나 사전에서 처음 접한 거대한 수의 이름들은 마치 비밀스러운 주문처럼 느껴졌다. 종이에다 0을 가득 늘어놓으며, “이보다 더 큰 수는 없을까?”를 묻는 게 내 놀이이자 탐험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무량(無量)’이라는 표현을 만났다. 처음엔 ‘경’보다 더 큰, 숫자의 이름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무량수는 단순한 수가 아니라, 불가사의(不可思議)의 만 배에 해당하는 수, 곧 10⁶⁸을 가리킨다. 모든 수 가운데 가장 큰 수이면서, 동시에 불교에서는 ‘광대무변한 진리와 깨달음의 세계’를 뜻한다. 숫자가 계산의 도구를 넘어, 셀 수 없음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흥미롭게도 서양에도 이와 비슷한 ‘큰 수의 놀이’가 있다. 그것이 바로 '구골(googol)'이다. 1938년, 미국의 수학자 에드워드 카스너는 9살 조카에게 “엄청나게 큰 수에 이름을 붙여보라”라고 부탁했다. 아이가 장난스럽게 내뱉은 말이 구골이었는데, 이는 10 ¹⁰⁰, 곧 1 뒤에 0이 100개 붙은 수를 가리킨다. 사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의 수가 약 10⁸⁰개라는 점을 생각하면, 구골은 이미 현실을 훌쩍 뛰어넘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이후에는 구골플렉스(googolplex)라는 더 거대한 개념까지 등장했지만, 그것은 실제로 쓰거나 적을 수조차 없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수였다.
이렇게 보면 무량수와 구골은 서로 멀리 떨어진 문화권에서 태어났음에도, 같은 진실을 비춘다. 인간은 끝없이 큰 수를 세어 보면서, 결국 헤아릴 수 없음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는 점이다. 그 벽을 우리는 동양에서는 깨달음의 세계라 불렀고, 서양에서는 장난스러운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나 둘 다 결국은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는 세계를 가리키려는 시도였다.
결국 인간은 큰 수를 상상하다가 자연스럽게 무한(∞)이라는 개념과 마주한다. 무한은 더 이상 수학적으로 셀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끝없이 도달하려 하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경계다. 흥미롭게도 상상력은 그 경계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무한을 향한 갈망은 문학과 철학 속에서 끝없이 새로운 질문을 낳았다.
상상에도 한계가 있을까?
내가 어린 시절 쥘 베른의 『해저 2만 리』나 『지구에서 달까지』 같은 소설을 읽을 때, 상상은 모험의 확장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오늘날의 SF는 다른 방향으로 뻗어 간다. 단순히 기술적 경이로움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조건과 윤리적 경계를 탐구하는 철학적 상상이 중심이 되고 있다.
테드 창의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 속 한 구절은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살아갈 수 있다. 알 수 없음은 공포이면서 동시에 가능성이다.
이 말처럼 현대의 SF는 상상의 끝에서, 오히려 인간의 한계와 그 너머를 응시한다.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도 그렇다. 기후 위기의 미래를 다루면서도 결국 묻는 것은 기술적 해결책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윤리적 기준을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다.
무한을 향한 상상은 언제나 인간을 그 경계까지 데려다 놓는다. 과학과 수학은 우리에게 끝없는 수를 가리키지만, 문학과 철학은 그 끝에서 다시금 우리를 유한한 존재로서의 자기 자리로 불러낸다. 무량과 구골이 그랬듯, 상상의 끝에서 우리는 결국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으며,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가?”
1. 인간과 상상력, 윤리적 경계
• 『당신 인생의 이야기』 – 테드 창(Ted Chiang)
미래 기술과 인간 경험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단편집.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깊은 사유.
• 『지구 끝의 온실』 – 김초엽
기후 위기와 생명 윤리, 인간 선택의 문제를 다룬 근미래 SF. 현실적 과학과 철학적 질문이 결합.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 듀나(Duna)
사회적·철학적 상상력이 가득한 단편집. 인간 존재, 사회 구조, 기술의 영향 탐구.
2. 상상력과 무한, 과학적 상징
• 『해저 2만 리』 / 『지구에서 달까지』 – 쥘 베른(Jules Verne)
과학적 상상력과 모험의 원형. 미지의 세계와 인간 탐험 정신.
• 『퀀텀 시리즈』 – 그렉 이건(Greg Egan)
양자 세계와 무한 계산, 인간 인식 한계 탐구.
• 『Ancillary Justice』 – 앤 레키(Ann Leckie)
인간 의식과 정체성, 사회적 규범과 윤리의 경계에 대한 상상력.
3. 철학적·문화적 무한 상상
• 『Culture 시리즈』 – 이언 M. 뱅크스(Iain M. Banks)
거대 문명과 무한한 기술적 가능성 속에서 인간과 사회의 도덕적 경계 탐구.
• 『삼체』 시리즈 – 리우츠신(Liu Cixin)
우주 규모의 사건과 문명, 인간 존재와 과학적 상상력의 극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