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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 Nov 05. 2024

망국의 한이 서린 왕산

첩첩산중 시골 마을, 소년이 앞마당에 섰다. 해 질 녘 그의 시선은 늘 그곳으로 향했다. 어둠이 깔리면 더욱 신비로운 기운을 내뿜었다. 소년은 하늘과 맞닿은 그곳을 한참 쳐다봤다. 책에서 읽은 큰 바위 얼굴 같기도 한 그곳은 어쩌면 곰이나 호랑이가 호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곳을 ‘왕산’이라 불렀다. 소년은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6백 년 전 그의 할아버지가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사연을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었다. 갓 쓴 할아버지는 그곳에 올라 나라가 망한 울분을 토해냈다고 한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소년은 50대 중반 시조 할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소년은 25년간 나와 함께 사는 남편이다. 그는 고향 집 앞마당에 설 때면 늘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올가을 남편은 그곳을 밟으리라 결심했다.      

지난 주말 우리 부부는 남편의 고향 땅 앞산 아래에 섰다. 경남 산청군 금서면 ‘왕산’. 산청읍에서 조금 벗어나니 한옥마을이 나타났다. 동의보감한방촌을 기점으로, 필봉산을 오르고 왕산을 밟고 ‘망경대’를 보고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무덤으로 하산하는 일정이다.

쟁기질하며 6남매를 키우신 시아버지는 늘 아쉬워하셨다. 앞마당에서 붓끝처럼 뾰족한 필봉산만 보였더라도 자식 모두가 박사가 됐을 거라며. “아부지, 다행인 줄 알아요. 그 자식들 뒷바라지 다 하려면 아부지 허리가 남아나지 않았을걸요.” 시아버지의 귀여운 농담을 남편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동의보감한방촌

필봉산에 이르는 등산로는 잘 정비돼 있었지만, 그 경사가 만만찮았다. 군데군데 밧줄을 잡고 바위를 탔다. 동네 앞산이 이 정도라니 내가 완전 깡촌으로 시집을 왔다고 구시렁거렸다. 남편도 뒤질세라 처가의 인근 산을 우습다 흉본다. 주왕산과 청량산 높이를 확인하며 1000m에 육박하는 동네 앞산보다 낮다며 으스댔다.

새벽녘 빗방울 때문인지 등산로에 인적이 없다. 고요한 산속에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분명 지도상에서는 1시간 남짓 걸리는 오르막길이었는데 쉬지 않고 걸었는데도 두 시간이 걸렸다. 필봉의 정상이 가까워지자 시야가 트이고 산청 읍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남편은 고향 땅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말이 많아졌다. 저기는 경호강이 남강으로 이어지는 곳, 여기는 자신이 다니던 중학교라며 손가락으로 연신 가리켰다. 바위가 인상적인 필봉의 정상에 섰다. 남편은 사방을 뺑뺑 돌며 숨은 그림 찾기 하듯 두리번거렸다. 부모님이 호미 들던 삼밭과 형제들과 고구마 캐던 밭을 찍어가며 추억을 더듬었다.

필봉산에서 바라본 산청읍내
왕산으로 걷는 길

필봉에서 컵라면 한 그릇을 먹고 왕산으로 향했다. “영험한 산이라 이제부터 힘들 거야, 각오해.”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그가 상상한 왕산은 바위산이고 험악하기 그지없는 곳인데 걷기에 너무 좋은 평평한 산길이 펼쳐졌다. 왼쪽은 지리산을 두고 오른쪽은 황매산을 바라보며 30분을 걸었을까. 왕산 표지석이 불쑥 나타났다. ‘세상에, 내가 완전 잘못 알았네, 이렇게 푸근하고 편한 산인걸’ 연신 중얼거리며 감탄하는 남편. 흐렸던 하늘도 맑아졌다.


왕산의 정상에서는 시댁이 또렷이 보였다. 감개무량하게 시골집을 내려다보는 남편. 왕처럼 크고 왕처럼 우러러보던 곳의 꼭대기에 드디어 발을 디뎠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은 것 같았다. 휴대전화를 들고 빙그르르 돌며 초등학교로 가던 길, 어르신들이 모여 놀던 정자가 있던 곳을 찍어댔다. 시조 할배가 한양 가까운 경기도 어디쯤 숨어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왜 지리산 산골짜기에 터를 잡아 우리 아부지를 그렇게 고생시켰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가 시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1392년 고려말 충신으로 알려진 예의판서 농은 민안부 선생은 역성혁명 이성계에 항거하다 결국 개경을 떠나 경남의 산골짜기에서 은둔하셨다. 32년의 공직 생활을 훌훌 털어버리고 호미와 괭이를 들고 농부로 살았다. ‘다만 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기를 구할 뿐’이라며 후인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 의롭지 못한 부귀는 뜬구름이라며 후손에게 벼슬이나 과거시험에 나가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의 시 한 수를 자랑스럽게 읊조린다.      


송악산 아래에 서 있는
높은 나무는 몇 번이나 봄을 지냈을고?
대부는 무슨 벼슬을 했는냐고 묻는다면
부자의 은혜와 군신의 의리뿐이리라 하리라
마침 와 보고 스스로 살 곳이 있으니
어디간들 가난이야 얻지 못하랴?     


할아버지께서 고려 왕이 계셨던 개경 땅을 바라보며 통곡을 하셨다는 ‘망경대’로 내려가는 길은 꽃길 같았다. 이렇게 좋은 산길은 처음이라며 그래서 시조 할아버지가 왕산을 다닌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소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길을 기분 좋게 걸었다. 늦가을의 하늘은 더없이 높고 맑았고 노란 나비들 구절초를 따라 날았다. 망경대에 서서 비석의 한자를 한 글자씩 짚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타협을 잘 모르는 고집스러운 그의 성정은 수백 년 전부터 이어진 값진 유산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농은 민안부 할아버지가 올라 개성을 바라보면 곡을 했다는 망경대

마지막 코스는 ‘구형왕릉’. 망국의 한이 서린 산청 땅의 역사를 되짚어보자면 고려 패망보다 더 앞선 800여 년 전 삼국시대로 거스르는 게 맞다. 법흥왕에게 나라를 갖다 바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의 유언. “나라를 잃은 죄인이기에 돌로 무덤을 만들어 달라” 왕산의 하산길에 들른 돌무덤은 기존에 봐 오던 왕릉과는 완전 다른 무덤이었다. 돌로 지은 피라미드식 층단을 바라보는데 슬픈 사연으로 채색되어서인지 애잔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편히 잠들지 않겠다, 죽어서도 무거운 돌덩이 아래서 망국의 한을 잊지 않겠다는 왕의 심정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금관가야의 마지막왕 구형왕릉


남편은 근래 최고의 산행이었다며 감격했다.  멀리서 바라본 왕산은 태산 같이 크고 엄숙했는데 걸어보니 더없이 편안하고 친근한 산이었다며 아이처럼 웃었다.  시조 할아버지의 강직함을 닮고 싶다는 남편은 내년 봄 형제들과 함께 다시 오르고 싶단다. 진달래 핀 그곳에서 개성 땅을 바라본 민안부 할아버지는 외롭고 처연했지만, 그 후손들은 봄날 즐거운 꽃놀이를 만끽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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