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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가야산의 봄

by 포롱

어쩌다 보니 남편의 고등학교 동기 산행 모임 멤버가 되어버렸다. 산을 좋아하는 ‘강아지과 아내’로 몇 번 따라 나섰다가, 어느새 그들의 꾸밈없는 유쾌함과 진한 우정에 푹 빠져버렸다. 이제는 안 보면 허전한 이들. 해마다 두 번, 전국 명산을 오르는 이들의 올봄 행선지는 합천 가야산이다.


예전 산악회 따라 올랐던 가야산은 만물상 능선으로 내려오는 하산길 고생이 더 진하게 남아 있다. 이번에는 백운동 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해 만물상 능선을 따라 걷다 칠불봉과 상왕봉을 올랐다 계곡으로 내려오는 정석 코스를 택했다.


구미김천역에서 남편이 ‘우리 예쁜 혜경이’라 부르는 언니의 차를 타고 합천으로 향했다. 암벽등반에 푹 빠진 언니는 놀라울 만큼 탄탄한 몸매로 변해 있었고, 남편은 “너무 예뻐졌다”는 감탄을 연신 터뜨렸다. 하지만 질투는커녕, 꼭두 새벽 떡집에서 공수해온 따끈한 콩떡을 건네는 언니의 따뜻한 마음에 이미 내가 먼저 반해 있었다.

탐방지원센터에는 산청, 진주, 강릉, 대전, 창원 등지에서 모여든 10명의 회원들이 있었다. 합천 출신인 호조씨는 “가야산은 뒷산이었다”며 여유를 부렸지만, 초입부터 가파른 오르막에 덥고 습한 날씨까지 겹쳐 금세 땀범벅이 되었다.

산행 속도가 빠르다 싶었는지 남편이 제동을 걸었다. “우리 마누라는 느림보라도 꾸준히 걷는다”며 나를 선두에 세웠다. 자존심 상할 법도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 입을 다물었다. 진달래와 연둣빛 나무 터널을 지나며 ‘이래서 산이 좋지’ 싶은 순간들이 이어졌다. 그들은 학창 시절을 추억하고, 퇴직 후의 삶을 이야기하며 걸었다.


봉우리를 하나 둘 넘을수록 바위는 점점 커졌고, 풍경도 점점 다채로워졌다. 드디어 만물상의 기암괴석 행렬과 능선이 시야에 들어왔다. 춤추듯 펼쳐진 바위와 아득한 산 아래 마을을 감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전설 속 상아덤에 도착했다. 가야국 여신과 하늘신이 만났다는 그곳에서, 서로를 끌어주고 밀어주는 지금의 동행들이 더욱 빛나 보였다.

산행 시작 세시간만에 서성재에 도착해 김밥과 컵라면으로 달콤한 점심을 먹었다. 마지막 순간 짠하고 꺼내놓은 상헌씨의 사과 15알은 지친 우리를 다시 한 번 감동시켰다.

산 정상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여를 더 올라야 한다. 점심후 산행길은 더 힘들어지는 법, 이후 다시 시작된 가파른 경사길에서 일부는 컨디션을 고려해 먼저 하산했다. ‘연륜’이란, 무리하지 않고 스스로를 아는 선택일 것이다.

얼마나 오르막을 올랐을까. 장단지와 허벅지가 단단히 뭉쳐지고, “아, 힘들다!” 싶을 즈음 칠불봉에 도착했다. 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득도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봉우리다. 이어지는 상왕봉은 넓고 평평한 정상에 옹달샘까지 있어 더욱 인상 깊었다. 비록 칠불봉이 3미터 더 높다지만, 위용만큼은 상왕봉이 주봉에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햇빛과 바람, 바위, 그리고 나를 품은 이 거대한 산과 하나 되는 이 순간. 마음은 말할 수 없이 평화롭다.

하산길, 터덜터덜 걷던 중 낯선 아저씨가 웃으며 다가와 말을 건다. “현미씨 아니세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남편의 동창이라 한다. 줄기차게 모임에 얼굴을 디민 덕분에, 어느새 나도 그들 사이에 인싸가 되어 있었다. 좀 쑥스럽다.

용기골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평탄한 길. 시원한 물소리와 향긋한 봄꽃 향에 피로는 어느새 사라지고,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산 아래 그림 같은 펜션, 이팝나무 아래에서 남편의 또 다른 친구들이 바비큐를 준비하고 있었다. 서부 경남 일대에서 모여든 이들 십여명이 더해져 즉석 미니 동창회를 열었다. 바람이 불고, 이팝나무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밤. 그들은 웃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밤을 채웠다.

일찌감치 자리를 비켜주고 조용히 잠에 들었다. 그들의 웃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품은 산, 7시간의 발걸음을 품은 가야산의 밤이 그렇게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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