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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털! 머리털! 머리털!

아내표 탈모약 모닝콜

by 포롱


62772175-d436-48f2-b203-c44afba56bfb (1).png 챗지피티가 그려준 이미지

남편이 탈모약을 먹기 시작했다.

진작부터 증세가 심해졌는데, 부작용이 어쩌고 저쩌고 하며 버틴 지 몇 년. 보다 못한 내가 정수리 부분을 찍어 보여주니 충격을 받았는지 그날로 바로 피부과에 가서 처방을 받았다.

그런데 의사가 그러더란다.

“50살 전에 시작해야 드라마틱한 효과가 있습니다. 지금은… 진행을 막는 정도죠.”

실망한 남편, 그래도 정수리는 지키자는 일념하에 성실히 약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이 들어 기운 빠지고 쪼그라드는 것도 서러운데, 머리털까지 빠지면 얼마나 기막힐까.

매달 미용실에 가야 할 정도로 머리숱 많은 나로서는 상상도 안 되는 스트레스일 수 있겠다.


어느 날, 남편이 이마를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었다.

“여보! 여기 솜털 올라온 거 보여? 나 회춘하는 거 아냐?”

가까이 들여다보니 정말 잔털이 송송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전부 흰색이다.

웃음이 터졌다. 회춘이라기보단 ‘백발 청춘’?

달여 지나자 정수리 부분이 눈에 띄게 수북해졌다. 어쩌다 만나는 지인들도 알아볼 정도였다.

그 후 남편의 탈모약 복용기는 내 단골 수다 소재가 되었다.

“어머, 그렇게 효과 있어요?”

“그 약 이름 뭐예요?”

남편은 수다스러운 마누라가 별 얘기를 다하고 다닌다고 혀를 찼지만, 옆에서 효과를 눈으로 확인했는데 이걸 퍼뜨리지 않고 배기겠나.

더 놀라운 건, 탈모약을 먹는 젊은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거다.

학교 동료 선생님의 아들은 이제 갓 대학생인데, 진작부터 복용 중이라고 했다. 30대 초반 미혼 조카들도 이미 처방받아먹고 있단다.

왜 이렇게 젊은 탈모약 복용자가 늘었을까?

유전 탓일까, 인스턴트 음식과 자극적인 식습관, 나날이 나빠지는 공기와 기후, 혹은 만성 스트레스 때문일까.

어쩌면, 풍요로운 시대 덕분에 ‘먹고사는 문제’보다 ‘외모 관리’가 더 큰 관심사가 된 세태를 반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탈모약이 원래는 고혈압과 전립선 치료제로 개발되다가 부작용으로 발견된 약이라는 역사도 흥미롭다.


각설하고, 효과를 본 남편은 밥보다 약을 더 꼬박꼬박 챙겼다.

하지만 뭐든 깜빡깜빡하는 나이에, 매일 일정한 시간에 뭘 먹는 게 쉬운 일인가.

옆에 있는 마누라가 챙길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머리털약 먹었어?”가 아침인사가 됐다.

‘탈모약’이라는 말도 있는데 왜 굳이 머리털약이냐며 핀잔도 받았지만, 이상하게 그 말이 입에 붙었다.

둘 다 깜빡하는 날이면, 남편은 왜 자기 약 안 챙겨줬냐는 원망의 눈빛을 보낸다.

아우, 귀찮아!

그러다 문득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모닝콜을 활용하자.

이럴 때야말로 낭독 배우는 마누라의 출동 타이밍!

아침에 일어나 약 먹으라는 대사를 몇 줄 적고, 잔잔한 음악에 맞춰 부드러운 목소리로 녹음했다.

그런데… 음악도 목소리도 너무 감미롭다.

이래서는 잠이 더 잘 들겠지, 깨긴 뭘 깨.

그래서 마지막에 반전을 줬다. 세 글자를 짧고 크게 몇 번 외치기로!!!.

세 글자? 바로 “머! 리! 털!”

과연 남편의 반응은 어떨까?


알람을 핸드폰에 설정하고 남편 머리맡에 두었다.

새벽녘, 잔잔한 음악과 함께 내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좋은 아침이에요.

이제 일어날 시간입니다.

햇살도 살며시 창문을 두드리네요.

부드럽게 몸을 깨우고,

잊지 말고 오늘도, 탈/모/약 챙겨 먹어요.

당신의 하루가 가볍고 건강하길 바랍니다.

머리털! 머리털! 머리털!”


남편이 눈을 뜨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는 피식 웃는다.

“와~ 이 마누라, 쓸데없는 낭독 배워서 이런 데 써먹네!”


오늘도 남편의 휴대폰에서는 내 목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머리털! 머리털! 머리털!”

남편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휘적휘적 주방으로 가서 머리털약을 챙겨 먹는다.

조금씩 늙어가지만 머리카락은 조금씩 자라며

50대 부부의 하루가 시작된다.

나날이 정수리와 이마가 훤해지고 있는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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