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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의 계절

by 포롱

황금연휴가 시작됐다.
몇 년 전부터 시댁은 추석 차례 대신 ‘가을 형제 모임’으로 방향을 틀었다.
덕분에 추석은 오롯이 우리 가족만의 시간이 되었다.

하늘이 높고 공기가 맑은 연휴 첫날,
이런 날 집에만 있는 건 너무 아깝다.
올해 네식구 연휴 첫 일정은 ‘대하먹기’다.

연애 시절, 김포의 허름한 비닐하우스

이곳을 처음 알게 된 지 벌써 30년이 다 되어간다.

그때는 남편과 한참 연애하던 시절.

“기가 막히게 맛있는 걸 사주겠다.”
남편이 야심차게 데려간 데이트 코스.

그 시절엔 내비게이션도 없었다.

논밭 사이를 덜컹거리며 지나며 ‘정말 이런 데 식당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 바닷가 끝자락, 허름한 비닐하우스가 나타났다.
간판이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나는 평생 잊지 못할 맛을 봤다.

바스켓 안에서 펄떡 거리던 왕새우도 신기했지만 왕소금 위에서 타닥거리며 익어가던

그 모습과 냄새는 무슨 쇼처럼 느껴졌다. 발갛게 익은 걸 까서 초고추장에 찍어 한입 물자마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쫄깃쫄깃한 식감, 고소하면서 달콤한 맛.
생전 처음 경험하는 황홀한 맛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게 있다고?’

마침 해가 서쪽으로 지고 있었다.
하늘은 붉게 물들고, 바다는 금빛으로 번졌다.
너무 맛있어 꼭 사주고 싶었다는 남편의 말,
그리고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런 사람이라면, 평생 함께 살아도 괜찮겠다.’

가을마다 반복되는, 의식 같은 여행

그날 이후 우리는 매년 어김없이 그곳을 찾았다.
가을마다 반복되는, 우리만의 행사.

신혼 시절 첫 딸을 가질 때도,
걸음마를 뗀 두 딸의 첫 장거리 외출도,
투닥거리던 자매의 화해의 장소도,

아빠에게 토라졌던 딸이
새우를 받아먹으며 슬며시 웃던 순간도,

그곳이었다.


너무 유명해져 버린 우리의 장소

하지만 몇 해 전부터, 그곳은 너무 유명해져 버렸다.
언제부턴가 대기표가 생기고,
옆 공터엔 새 건물이 세워졌다.

직원들은 끊임없이 몰려드는 손님들에게 짜증난 얼굴로 응대했고,
몇 년 전부터는 양념과 식기구까지 직접 챙겨가야 했다.

올해도 일찌감치 출발했지만,
대기번호는 79번.
예상 대기시간 130분.

수십년 인연에게 이별을 고하는 심정으로

우린 만장일치로 귀가를 결정했다.

2kg을 포장해 트렁크에 싣고 돌아서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주차장을 가득 메운 차와 사람들 사이로
오랫동안 함께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서로의 손을 잡고 소곤거리던 20대의 우리,
두 딸의 입에 새우를 까 넣어주던 30대의 우리,
사춘기 딸들이 함께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던 40대의 우리.

만인이 다 아는 그곳은 더 이상 애틋하지 않다! 를 외치며

마음 변한 연인에게 이별을 고하듯
가차 없이 돌아섰다.


그래도, 새우 냄새는 여전하다

집으로 돌아와 부르스타를 꺼냈다.
프라이팬에 굵은소금을 두르고
펄떡이는 새우들을 쏟아부었다.

이젠 아이들도 능숙하게 껍질을 벗긴다.
“새우머리가 더 맛있어!”
어느새 아이들은 그런 말을 할 만큼 자랐다.

“그 바닷가에서 막대기 들고 놀던 거 기억나?”
“대하 먹고 전망 좋은 카페에서 커피 마시던 거!”
“가는 내내 차 안에서 노래 신나게 불렀잖아.”

새우가 익어가는 고소한 냄새는 여전한데,

마음 한편이 허전하다.

내년에도, 그 바닷가로

수북이 쌓인 새우 껍질들.

배는 부른데,
왠지 더 먹고 싶은 기분.

“그래도 내년엔, 거기서 먹고 오자.”
남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맞아, 기다리면 더 맛있을 거야.”
큰딸이 맞장구를 쳤다.

“놀거리 들고 가서 차에서 시간 보내면
두 시간쯤 후딱 갈걸.”
작은딸이 웃으며 보탰다.

“그래, 집에 배인 새우 냄새 감당 안 돼.”
나도 한마디 했다.

어느새
마음을 고쳐먹은 네명.


다시 가을이 오면,
우리는 또 그 바닷가로 향할 것이다.

조금 더 서두르겠지만,
조금 더 설렐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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