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도 옮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불볕더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물러갔다. 올해는 유난히 더웠다. 한여름에도 이불을 덮고 자던 내가 이불은커녕 옷을 훌렁 벗고 선풍기를 틀어야만 했다. “더워 미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에어컨 온도를 연신 내려가며 버텼다.
드디어 하늘은 높아지고 풀벌레가 운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아침저녁은 서늘해졌는데 내 몸은 여전히 불덩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수시로 열이 뻗친다.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목덜미가 흥건해지고, 찌개라도 끓이려 불 앞에 서면 등줄기로 땀이 줄줄 흐른다. 실내온도를 확인해 본다. 34도가 아니라 정확히 24도. 혹시, 이게 말로만 듣던 갱년기일까. 드디어 몸도 계절의 문턱을 넘는 건가.
급기야 몸의 변화는 수시로 감정을 요동치게 한다. ‘언제까지 너네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냐!’ 속에서 불덩이가 치밀어 오른다. 딸들 앞에서는 겨우 한숨으로 삼키지만, 남편 앞에서는 다르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 맨날 밥상을 차리냐고! 다음 생엔 바꾸자! 나도 누가 차려준 밥상 한번 받아보자!”
남편은 씩 웃으며 밥을 꺼내고 국을 푼다. 분명 잘 도와주는 사람인데, 내 기준은 자꾸 높아진다. 이젠 ‘도와주는’ 거 말고 분담하자고! 그래서일까, 요즘 집안 식구들이 내 눈치를 자꾸 본다. 어느새 집안의 폭군이 되어버린 나.
“얘들아, 나만 이런 거야?”
초등학교 동창들과 풀빌라에 몸을 담그며 물었다. 모두 빙긋 웃는다. 드디어 너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현모양처라 불리던 *정이는 아들 셋과 남편에게 매일 짜증을 퍼붓고 있단다. “내가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괴롭다”는 고백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일에 더 집중하며 대신 힘든 인간관계를 싹둑!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어느새 내가 테토녀(남성성이 강한 여성: mz세대의 유행어)가 됐더라”는 말에 폭소가 터졌다. *영이는 나와 똑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이 치솟아 땀을 식히느라 분주하다고.
서울 근교로 떠난 가을 소풍. 우리는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속 얘기를 털어놓았다. “아무리 운동해도 살이 안 빠져”라며 투덜대다가도, “그래도 아직 훌륭하다”며 서로를 다독였다. 코흘리개 시절을 함께한 친구들이 어느새 오십 줄에 들어섰다. 나 혼자 늙는 게 아니구나. 그 사실만으로도 묘한 위로가 됐다. 우리, 더 자주 만나자며 의기투합했다.
새벽 다섯 시. 또 갑자기 눈이 떠졌다. 몸은 찌뿌둥하고 관절은 뻣뻣하다. 그래, 오십 년을 썼으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심호흡으로 몸을 달래던 순간, 옆에서 곤히 자던 남편이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벽 쪽으로 밀쳤다. 그러더니 선풍기를 강풍으로 틀고 앉아 속옷을 펄럭인다.
눈이 동그래져 그를 쳐다봤다.
“와… 뭐냐, 이 열대야! 여보, 안 더워?”
갱년기도 옮는 걸까? 갑자기 오한이 들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