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보폭

투덜이 남편이 되어 쓴 한라산 산행기3

by 포롱

11시 15분, 삼각봉대피소에 도착했다. 출입 통제 시간 다 됐다며 서둘러 정상으로 향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대피소엔 점심을 먹고 막 일어서는 무리가 대부분이다. 화장실을 다녀온 후 한라산 칼바람을 대비해서 중무장을 했다. 마누라는 두꺼운 오리털 파카를 꺼내 입는다. 올겨울 초입에 산 옷이다. 부부가 나란히 겨울옷을 장만했지만, 나는 집에 고이 모셔두었다. 이런 험한 산에 오는데 그걸 입을 수는 없다. 반면 마누라는 산 날부터 줄기차게 입고 다닌다. 출근할 때도, 외출할 때도, 산에 올 때도 늘 챙긴다. 그러면서 나 보고 묻는다.

“왜 그 좋은 옷 안 입어?”
“아끼는 거야. 땀나는데 그걸 왜 입어?”
“아끼다 똥 된다.”


두건으로 눈만 빼꼼 내민 채 출발하는 마누라. 땀날 텐데. 가파르게 치고 오르는 코스, 백록담까지 두 시간 남았다. 이 정도 높이에 오면 이국적인 설경이 힘듦을 잊게 해 줄 것이다. 정말 거짓말처럼 시야가 확 트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시름을 잊게 만드는 풍광이 펼쳐졌다.

“우리 남편, 장가 잘 와서 이런 걸 보지.”
한껏 기분 좋아진 마누라 말이 많아진다.
“맞아. 그 말은 사실이야.”


나는 집에 있는 걸 즐기는 집돌이다. 마누라는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 나와 다른 마누라 덕에 전국 각지 산을 있다.

“점심 먹을까?”
마누라가 묻는다.

길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잠시 앉아 있었을 뿐인데 손가락이 얼어붙는 느낌이다. 설익은 라면을 허겁지겁 먹었다. 삼각김밥을 까다 문득 오늘 아침 편의점에서 둘이 티격태격했던 일이 떠올랐다. 마누라는 삼각김밥을 사면 꼭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어차피 금세 식을 텐데, 왜 데우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인터넷에 찾아봤는데 삼각김밥 데워 먹는 사람이 4, 그냥 먹는 사람이 6 이래. 그냥 먹는 사람이 더 많아. 이상한 사람들이 더 많아.”
마누라도 아침 일을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삼각김밥을 데워 먹는 사람이 40%나 된다고? 그게 더 놀랍다.

뜨끈한 국물이 들어가는데도 추위가 살갗을 파고든다. 후다닥 짐을 챙기고 걷던 다시 길을 나선다. 능선에 오르자 바람이 세진다. 그럴수록 설경은 더 선명해진다. 마누라는 연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마누라가 두 여성에게 말을 건다. 속셈을 안다. 우리도 찍어달라는 거다. 덕분에 부부 사진 하나를 건진다.

정상까지 한 시간을 남기고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진다. 소위 말하는 깔딱 고개다. 백록담을 찍고 하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몇 시에 출발하셨어요?”
“새벽 6시, 성판악에서요.”
“아이고, 부지런하시네요. 조심히 내려가세요.”

힘들어하는 마누라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있다.

“조금만 힘내세요. 다 왔어요.”

“저 여기서 포기하고 싶어요. ”

“아이구. 안돼죠. 진짜 코앞이 정상입니다. 파이팅!”
'말걸기'는 마누라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인가 보다.

외국인도 지나가며 마누라에게 뭐라 뭐라 한다.
“저 사람 뭐랬어?”
“해피 뉴 이어 하래.”

성격은 타고난다. 나는 아무리 애써도 쉽지 않다. 그래도 다정한 등산객들 사이에 조금은 익숙해졌다.

낑낑거리며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던 중, 한 여성분이 말을 건다.
“정상 가면 하늘이 열려요. 백록담도 볼 수 있어요!”

3년 전엔 날씨가 좋지 않아 보지 못한 백록담. 오늘은 볼 수 있겠구나. 겨울 한라산 백록담은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데, 이게 웬 횡재인가 싶다.

그 말 이후 거짓말처럼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상고대 사이로 파란 하늘이 드러나고, 머리 위에서는 바람이 구름을 몰아낸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풍경도 달라진다. 눈은 바람에 견디려는 듯 날카롭고 단단하게 나무에 붙어 있다.

마누라는 이제 휴대폰으로 동영상까지 찍는다. 배터리가 불안한다 싶더니,
“나 핸드폰 꺼졌어. 망했다.”
저럴 줄 알았다. 너무 요령없이 산다. 어쩌겠나, 이제 내 휴대폰으로 살아야지. 다행히 내 배터리는 아직 넉넉하다.

백록담이 측면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쉬지 않고 오르는 한걸음 한걸음이 참 대단하다. 뒤를 돌아보니 저 길이 우리가 오른 길인가 싶을 정도로 아찔하다. 겨울 백록담을 오른 자 모두는 대단한 체력가들이다.

드디어 정상에 섰다. 거짓말처럼 하늘이 열리고 햇빛이 반짝인다. 제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반대편에는 운무가 층층이 쌓여 있다. 넋을 잃고 비경을 감상하고 있던 찰나 누군가 소리친다.
“이제 내려가세요. 1시 30분입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다. 여기서도 쫓기는구나.
“우리 금방 왔어요. 인증만 하고 갈게요.”
넉살 좋은 마누라는 직원에게 사진 촬영을 요청한다. 갈길 바쁜 직원은 군말 없이 셔터를 눌러준다.
“여러분 내려가셔야 제가 퇴근합니다.”

오래 머물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바람은 거세고 손끝, 발끝, 코끝이 얼얼하다. 선명한 백록담을 카메라에 담고 하산길에 나섰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은 욕심에 원점회귀, 관음사 코스를 택했다. 올라올 땐 몰랐는데 길이 제법 미끄럽다. 몇몇은 아예 비닐을 깔고 미끄럼틀을 타며 내려갔다. 나도 그들을 따라해봤다. 겁많은 마누라가 뭐라뭐라 한다.

탐라대피소에 앉아 따끈한 차라도 마시려니 빨리 하산하라는 방송이 나온다. 시간에 쫓기는 꼴찌 인생이 이런 거구나 싶다.


지루한 하산길 부부는 말이 없다. 빨리 내려가서 뜨끈한 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을 것이다. 하산 종료 한 시간을 남겨두고 마누라는 갑자기 초콜릿을 내 입에 넣어준다.

“왜?”
“3년 전처럼 또 버리고 갈까 봐. 미리 처방하는 거야.”


3년 전 그날, 앞서 가던 젊은이들이 답답해 마누라를 두고 혼자 내려갔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질퍽한 길이 싫었고 어깨도 아팠고 다리도 힘들었다는 내 변명들을 마누라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두고두고 들을 것 같다. 이번엔 초콜릿을 씹으며 속도를 맞춘다. 앞서지도, 처지지도 않고 같은 보폭으로 내려온다. 마누라는 옆에서 쫑알거리고 나는 대답 대신 웃음으로 받아낸다.

오후 5시 하산 , 8시간의 한라산 등정 완료. 올겨울 남편의 의무는 다한 셈이다. 가벼워진 배낭만큼 마음도 한결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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