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이 남편이 되어 쓴 한라산 산행기 2
하늘에서 눈발이 날린다. 뽀득뽀득 눈 밟는 소리, 한기가 느껴지던 몸에 어느덧 땀이 찬다. 나는 땀이 싫다. 그래서 운동도 종일 뛰어야 하는 구기종목은 싫다. 짧고 굵게 판가름이 격투기가 좋다. 씨름을 잠시 했던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런 내가 10시간 가까이 땀 뻘뻘 흘리며 산을 타는 걸 보면 가정을 일구며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뾰족구두 신고 수락산 오르던 20대의 처녀에게 반한 내가 바보다.
“여보, 아이젠 하자.”
마누라가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이상하다. 요즘은 마누라가 입을 다물면 마음이 불편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자꾸 눈치가 보인다.
“이렇게 쭉 걸으면 시간 줄일 수 있어.”
경량파카 하나를 벗었는데도 훨씬 몸이 가볍다. 마누라도 옷을 하나 벗는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땀으로 폭삭 젖어있다.
“모자도 장갑도 벗어. 안 더워?”
땀이 많은 마누라는 늘 미련곰탱이처럼 옷을 많이 입는다. 땀이 좋단다. 그렇지, 그녀는 사우나도 찜질방도 사랑하지. 체질도 정반대인 우리가 이렇게 잘 사는 거 보면 그것도 신기하다.
한라산의 매력은 완만한 경사로 산정상까지 안내하는 친절한 코스다. 관음사 코스도 초입은 편안한 경사도다. 원래 자갈이 많은 너덜길이지만 눈이 와서 그나마 걷기에는 더 좋다. 아이젠을 차고 걸으니 속도가 더 빨라졌다.
길옆 조릿대들은 눈 속에 파묻혔고 길가 늘어선 나무들도 상고대가 꽤 볼만하다. 앞선 마누라는 여전히 말이 없다. 걸음이 여전히 힘찬 걸 보니 시간 계산을 끊임없이 하고 있을 것이다. 비행기 타고 어찌 온 산인데 정상을 꼭 찍고 가겠다는 저 집념 무섭다. 그래서인지 산행 소요시간을 서서히 줄이고 있다. 이렇게 가면 진짜 정상까지도 가능할 것 같다.
탐라대피소를 지나자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눈발이 날렸다 멈췄다를 반복하고 기온도 꽤 내려간 것 같다. 그럴수록 설경은 더 짙어진다. 앞선 마누라가 걸으며 물을 먹는다. 쉬지도 않고 앞만 보고 걷는 등산, 이런 걸 정말 싫어하는 그녀가 오늘은 반대의 모습을 연출한다.
등산을 갈 때면 늘 티격태격하는 지점이 그런 거다. 마누라는 경치 좋은 곳에서 사진 찍고 드러눕고 커피 마시고 수다 떨고 놀고 싶어 한다. 나는 빨리 정상 찍고 집에 가고 싶다. 적당히 타협하며 다니는데 역할이 오늘은 바뀌었다. 설경이 그림 같아지고 있다. 눈길 주고, 발길 멈추고 싶을 텐데 마누라는 앞만 보고 오른다.
산행길에 사람도 거의 없다. 국립공원 예약시스템이 운영되면서 인원수가 조절되는 것도 있지만 워낙 늦게 출발했으니 우리가 꼴찌라는 말이다. 삼각봉 대피소까지 시간을 못 맞추면 입산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다. 네이버지도로 예상소요시간을 찍어보니 시간을 얼추 맞출 것 같다. 마누라는 길고 가파른 계단도 성큼성큼 잘 올라간다. 나는 숨이 턱턱 찬다. 하지만 티 낼 순 없다. 자존심이 있지. 얼마쯤 왔을까. 예상 안내 지도를 보니 대피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 계산을 하니 이제 안심해도 될 것 같다.
“여보, 됐어! 따라잡았어. 우리가 1시간을 줄였네. 대단해!”
“그래?”
앞섰던 마누라가 이제야 뒤돌아보며 싱긋 웃는다.
“여보, 거기 서봐. 진짜 이쁘다.”
마누라가 휴대폰을 꺼내 나를 찍어준다. 나도 얼른 마누라를 찍어줬다.
그녀의 언어를 알기까지 20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그대로 나를 사진에 담고 싶은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본인을 찍어달라는 거였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냐고 하는데 난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냥 이젠 공식처럼 외웠다.
마누라가 나를 찍어줄 땐 그녀를 찍어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