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이 남편이 되어 쓴 한라산 산행기1
이렇게 추운 날씨에 왜 마누라는 자꾸 한라산을 가자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피부과 진료 후 햇빛 받으면 안 된다며 비행기표를 취소하라는 압박을 슬쩍 흘려본다. 선크림 잘 바르면 문제없다며 들은 척도 하지 않는 마누라. 비싼 비행기값 핑계도 못 댄다. 평일 특가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싼 티켓을 이미 끊어놨다. 게다가 바깥잠 싫어하는 내 성격을 알고 당일치기 일정까지 짜둔 철두철미함. 휴가만 내라며 3주 전부터 노래를 부르니 외면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 가자. 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하나 못 들어주겠나.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컵라면 두 개와 뜨거운 물만 넣었는데도 배낭은 집채만 해진다. 얄미운 마누라는 가벼운 짐은 자기 가방에 넣고 무거운 건 모조리 내 배낭으로 보낸다. 따뜻한 집을 두고 엄동설한에 집을 나서려니 또 슬슬 짜증이 올라온다. 북한산도, 관악산도 충분한데 굳이 비행기를 타고 제주까지 날아가야 하나. 운동치고는 너무 비효율적이다. 그래도 편한 건 있다. 항공 티켓팅부터 탐방로 예약까지 모든 건 마누라 몫이다. 목마른 자가 우물 파는 법이다.
매해 겨울만 되면 한라산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마누라는 어떻게든 가고야 만다. 동네 산악회를 따라가기도 하고, 친구들과 떠나기도 하는 걸 보면 겨울 한라산이 어지간히 좋은가 보다.
공항에 도착해 출국 절차를 밟는데 마누라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보안검색대를 통과한 뒤 아무리 기다려도 보이지 않는다. 전화를 했더니 티켓에 문제가 생겼다며 먼저 탑승구로 가란다.
혼자 설렁탕을 먹고 기다려도, 또 기다려도 마누라는 나타나지 않는다. 탑승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연락이 없다. 다시 전화를 하니 비행기를 먼저 타란다. 뭔 일인지, 설마 혼자 가는 건 아닐지 별생각이 다 든다.
출발 시간에 임박해 헐레벌떡 나타난 마누라. 항공권 예약 시 자기 이름을 영문으로 적었단다. 그런데 신분증은 주민등록증이라 본인 확인이 안 돼 다시 항공사로 가 한글 이름으로 바꾸느라 바빴다는 이야기다.
남편은 한글로 예약하고 왜 자기 이름만 영문으로 했을까. 이해는 안 되지만 따지면 안 된다. 이럴 땐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는 게 삶의 지혜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옆자리 마누라가 내 손을 꼭 잡고 있다. 손에는 진땀이 가득하다. 시계를 보니 도착 예정 시간보다 20분이나 지났다. 제주공항 기상 상황이 나빠 착륙 허가가 날 때까지 공중을 돌고 있는 중이란다. 겁 많은 마누라 손에 자꾸 힘이 들어간다. 이제 또 쓸데없는 걱정으로 오만 가지 시나리오를 쓸 게 분명하다.
“자긴 안 무서워? 비행기가 착륙을 못 하고 있는데?”
“뭐가 무서워. 허락 떨어지면 금방 착륙하겠지.”
내 말이 맞았다. 30분 연착 후 비행기는 무사히 제주에 내렸다. 잡생각이 많은 마누라, 사는 게 참 피곤할 것이다.
서울은 영하 10도까지 내려간 강추위였는데 제주 하늘은 잔뜩 흐리고 비 예보가 있다. 오전 8시가 훌쩍 넘은 시각, 택시를 타고 관음사로 향하며 물었다. 어느새 비는 눈으로 변해 펄펄 날린다.
“왜 성판악 출발 아냐?”
“예약이 다 찼고 관음사만 겨우 두 자리 비었거든.”
관음산 코스로 올라간다고? 성판악 코스는 1100 고지에서 출발해 완만한 길로 4시간 반이면 정상 1947m에 닿지만, 관음사 코스는 500 고지에서 시작해 8.7km를 올라 5시간이 걸리는 험한 길이다. 한마디로 난이도가 더 높다는 말이다.
막무가내에 오지랖 넓은 마누라는 오늘도 택시 기사님과 수다를 떤다. 제주 사투리를 쓰는 기사님은 이 시간에 출발해서는 백록담 정상까지 못 간다며 괜히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3년 전에도 공항에서 성판악행 버스를 놓쳐 시간에 쫓기며 정상을 올랐다. 오늘도 쉽지 않겠다는 예감이 든다.
등산로 입구에 내리는 9시. 삼각봉대피소에 11시 30분까지 도착해야 백록담 입산이 허락된다. 보통 3시간 반 걸리는 구간을 한 시간이나 단축해야 한다.
출발과 동시에 마누라는 말이 없다. 긴장하거나 힘들거나 화가 나면 나타나는 증상이다. 초조해하는 마누라에게 한마디 했다.
“쉬지 않고 걸으면 가능해.”
마누라는 대꾸도 없이 속도를 높인다.
“오버 페이스 하지 말고!”
늘 조잘거리던 마누라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경험상 이럴 땐 기다리면 된다. 초입부터 길이 미끄럽다. 보폭이 짧은 마누라의 잰걸음에 괜히 걱정된다.
“뭐가 문제야. 시간 안 되면 중간에 내려오면 되지.”
순간, 마누라가 휙 쏘아본다.
앗. 말 잘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