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끄적거리는가

어렸을 적 부터 이어진 쓰기 습관...창피한 줄도 모르고 공개

by 포롱

“아니, 왜 사서 고생이야? 전업 작가야? 편히 쉬지. 이해할 수가 없네.”

“......”

오늘도 또 남편이 뭐라 한다.

그러든가 말든가.


지난 주말부터 선생님들과 매일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매일 글 한 편을 써내는 게 얼마나 부담스럽고 힘든 일인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시작했다.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 가당키나 하냐고. 주말에 쓰는 교단 일기 한 편도 허덕거리면서 무슨 무모함이냐고. 산책도 운동도 이젠 못하겠네. 못하겠어.

-잘했어. 뭐든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낫잖아. 끄적거림의 즐거움 알잖아? 네가 막 쓰고 싶은 대로 써. 누가 시킨 거도 아니고 좋아서 쓰잖아.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고향은 완전 깡촌이었다. 초등학교는 차도 잘 다니지 않아 걸어서 한 시간을 가야 했다. 고향 마을은 꽤 커서 또래가 많았다. 동갑내기들이 일렬횡대로 산길도 걷고 하천 옆길도 걸었다. 지루한 등하굣길에 나의 역할은 이야기꾼이었다. 명작동화 전래동화 전집을 친구 집에서 빌려서 읽고는 그걸 아이들에게 들려줬다. 얘기 두세 편을 침 튀기며 해주다 보면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면 어디에서 끊을까 궁리하며 완급 조절도 하는 나름 머리를 썼다. 극적인 장면에서 “다음은 내일 아침! 나, 간다!” 를 외치며 냅다 뛰는 나. 평범하고 조용한 내가 그때만큼 인기 있었던 때가 있었을까.


사춘기는 책을 읽으며 보냈다. 무능한 아빠에 대한 분노와 고생하는 엄마에 대한 연민을 수많은 문학작품을 보며 삭였다. 그리고 끄적거렸다. 우울하고 슬프고 억울하고 불안한 혼란스러운 마음을 마구마구 쏟아냈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약간의 재주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학교 대표로 나갔던 육사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다. 어떤 글을 썼는지 기억은 희미하다. 항아리가 글감이었는데 할머니 이야기를 썼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일기를 썼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학습 일기에 가까운 끄적거림이었다. 오늘은 얼마큼 공부했고 뭐가 힘들었고 이걸 알게 됐다는 식의 글이었다. 작은오빠 친구를 보며 설렜던 날 누구에게도 못했던 말들을 끄적거렸던 날의 기록도 있고 친한 친구와 묘한 경쟁심으로 힘들었던 날의 마음도 남았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학생운동을 하던 오빠의 구속 등 휘몰아치는 사건을 버티게 해줬던 것도 ‘끄적거림’이었다.

19살, 서울로 대입 시험을 보러가기 전에 썼던 일기. 지금 읽어도 울컥한다.


대학을 입학한 후 ‘끄적거림’의 욕구는 동아리 활동으로 이어졌다. 학보사 기자로 교내를 종횡무진했지만, 이상하게 그런 글쓰기는 나와 맞지 않았다. 정의니, 시대정신이니 하는 거대 담론이 다소 버겁게 느껴졌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편집국장 선배가 나를 앞에 세워 놓은 채 30분을 원고만 쳐다보다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빨간 볼펜으로 내 기사에 엑스표를 크게 쳤다. 그날 처음으로 대들었다. 왜 꼭 그런 형식으로 써야 하냐고. 왜 메시지를 강요하냐고. 여기가 공산당이냐고, 하고 싶었던 얘기를 직설적으로 해야 하냐고 막 소리 질렀다. 우린 선동지가 아니라고 판단은 학우들에게 맡기는 게 맞다고. 선배의 황당한 눈빛이 아직도 기억난다.

쓰는 게 좋아서 첫 직장으로 신문사를 선택했지만, 나의 고민은 대학 때와 다르지 않았다. 업무를 했지 ‘나의’ 글쓰기 기억은 거의 없다. 지금의 남편과 연애하면서 좀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지극히 사적인 글쓰기다. 아주 유치하고 닭살 돋은 표현이 가득한 연애편지와 약간의 멜랑꼴리한 글들이 대부분이다. 직장을 다니며 연년생 두 딸을 키울 땐 끄적거림은 사치였고 긴 공백이 수년간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아깝고 안타까운 시간이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엄마는 교사 딸을 만들고 싶어 하셨다. 콧방귀도 안 뀌던 내가 30대 초반에 다시 대학에 다니며 제2의 인생을 준비한 건 순전히 육아 때문이었다. 일반 회사에 다니면서는 도저히 아이들을 키울 수가 없었다. 어찌어찌 유아기를 넘겼지만,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수시로 야근했기에 놀이방 할머니가 수시로 집으로 오셨고 딸들은 엄마·아빠도 못 보고 잠이 들기 일쑤였다. 나도 일하는 엄마를 보며 컸기에 그 시절 외로움과 상실감을 안다. ‘그래, 더 늦기 전에 다시 도전해 보는 거야.’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두 딸을 키우면서 나의 끄적거림은 다시 시작됐다. 답답한 마음을 풀 데가 없었다. 해답도 안 보이는 안갯속을 헤매는 기분을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싶었다. 이따금 사건 사고가 터질 때마다 끄적거렸다. 당시엔 ‘카** 스토리’라는 앱이 있어 보관했고 친구들에게만 공개했다. 사춘기 딸들과의 우당탕 에피소드는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아기를 키우는 후배는 미리 예습하고 있다고 했고 육아에서 벗어난 선배는 내게 조언도 해줬다. 미숙한 부모로 자괴감에 빠져 있을 땐 친구들이 자기도 그랬다는 한마디가 큰 위안이 됐다. 질풍노도의 시기 딸들과 평화롭게 지내는 법을 다양하게 궁리했고 그 결과 걷기와 등산 예찬론자가 됐다. 그 이야기도 소곤소곤 들려줬다.


“주말에 **산 걸을까?” “퇴근 후에 **천서 만나.” 함께 걷는 친구, 산을 같이 가는 지인과 두런두런 이야기한다. 순간의 반가움과 감동을 남기고 싶다. ‘3일 동안 선생님을 못 봤더니 보고 싶었다. 그런데 아침 등굣길 선생님 얼굴이 화나 보인다. 무슨 일일까.’ ‘선생님이 딱 잘라 “체육 못해. 안돼”라고 해서 서운하다.’ 아이들의 끄적거림에 나도 대답해 주고 싶다. 또 책상 앞에 앉아 끄적거린다. 아, 어렸을 적 친구들에게 소공녀 이야기를 해주던 내가 나의 이야기와 우리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구나.


지천명이 코앞이다. 나는 거창한 글을 쓸 줄도 모르고 쓰고 싶지도 않다. 화려한 표현과 멋들어진 글 쓰는 법을 배워본 적도 없다. 평범한 일상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을 기록. 그 찰나의 마음을 친구들과 아이들과 공유할 수만 있다면 이것 또한 의미 있지 않을까.


나의 끄적거림의 첫 독자인 남편은 맨날 그런다.

“메시지가 없어. 메시지가!”

말하기 싫다.

대신 내 글 애독자들의 사탕발림 댓글로 응수해 본다.

“선생님, 일요일 저녁만 기다려요. 선생님 교단 일기 재밌어요.”

“선생님 마음 알 수 있어서 좋아요. 우리가 너무했어요.”

“유쌤 글은 술술 읽혀. 읽고 나면 한 1분 정도 마음이 따뜻해져.”

“맨날 화려한 스테이크만 썰고 사냐? 슴슴한 된장찌개도 먹어야지. 네 글이 딱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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