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도 어느 두메산골이다. 50여 가구의 집이 다닥다닥 붙은 그곳은 옆집도 앞집도 뒷집도 모두 아재 아지매인 친척이었다. 책이라도 볼라치면 전기 아껴야 한다며 아버지는 역정부터 내셨다. 문명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곳엔 동갑내기 친구들이 많았다. 남자 5명 여자 7명. 유난히 사이가 좋았던 우리는 늘 떼거지로 다녔다. 참새처럼 하도 조잘거리며 다니니 동네 어른들은 우리가 지나가면 “허이 요놈들! 늘 떼 지어 다니네” 하시며 곱게 눈을 홀키곤 하셨다.
그 시절 아이들이 모두 그렇게 놀았을까? 간식이 귀했던 시절 우리는 본능적으로 먹거리를 찾아다니는 게 놀이였다. 마을 뒷산이 벌겋게 변하는 4월엔 본격적으로 산을 헤집고 다녔다. 입술이 시퍼래지도록 참꽃을 따먹고 꽃을 머리에 꽂고 놀았다. 찔레 새순은 맛이 더 좋았다. 떫고 쌉싸름하지만 오래 씹다 보면 달콤한 맛이 일품이었다. 우린 묘한 경쟁심에 산속 깊은 곳까지 마구 진출했다. 굵고 육즙이 많은 찔레는 사실 땅찔레인데 그건 깊숙한 풀 속을 헤쳐야 얻을 수 있어 뱀을 만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어렸을 때부터 겁 많고 허당기 가득했던 나는 찔레 꺾기도 늘 꼴찌였다. 친구들의 굵직한 찔레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참꽃과 찔레가 시들할 쯤엔 아카시아가 강줄기를 따라 지천으로 피었다. 아카시아 꽃을 훑어먹고 꿀을 쏙쏙 빨아먹다 지치면 목걸이도 만들고 팔찌도 만들고 반지도 만들었다. 감꽃 필 무렵엔 그 꽃으로 주렁주렁 팔찌 목걸이를 멋들어지게 걸었다.
여름엔 친구들과 개울가로 몰려갔다. 물에서 놀다 지치면 동네 느티나무 아래서 공기놀이, 땅따먹기, 말타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사방치기, 고무줄놀이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져도 누구 하나 집으로 돌아가는 법이 없었다 왜냐고? 놀이의 하이라이트 숨바꼭질이 남았기 때문이다. 나무인지 사람인지 구분이 안 가 슬슬 귀신 생각에 집 생각이 날 때쯤 엄마들은 약속이나 한 듯 “OO야 밥 먹어라” 소리를 질렀다.
사실 우리 떼거지들의 아지트는 동네 점방이었다. 각양각색의 과자들이 즐비한 곳을 늘 서성거렸는데. 그러다 한놈이 100원을 들고 오면 아폴로, 뽀빠이, 별사탕 등 이제는 이름도 기억 안나는 갖가지 불량식품 중에서 무엇을 먹어야 하나 인생 최대의 고민을 했다. 그래도 최고 인기는 아폴로와 라면이었다. 아폴로는 개수가 많아 하나씩 나눠 먹는 재미가 좋았다. 라면은 모조리 박살을 내고 수프를 넣어 잘 흔들면 짭조름하면서도 매콤한 맛과 고소한 면의 조합이 과히 환상적이었다. 한 명이 배급을 하고 대여섯이 둘러앉아 입안으로 받아먹었던 광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들의 생활 공동체, 경제 공동체는 완벽했다.
텔레비전 보러 옆집으로 원정도 많이 다녔다. 기억나는 한 장면, 마을 어른들이 대통령의 장례식을 보러 한 집에 모였고 이내 울음바다가 됐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우리나라가 망하는 줄 알고 우리도 막 따라 울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생긴 건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것 같다. 텔레비전은 우리 집 보물 1호여서 아버지가 자물쇠로 잠가 놨는데 아버지는 막내인 나에게는 인심이 후하셨다. 호랑이 선생님을 시작으로 들장미 소녀 캔디, 은하철도 999, 천년 여왕, 플란더즈의 개, 세계명작동화를 친구들과 함께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불렀다. 그 주제곡들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나의 유년기의 전부였던 마을 친구들과 헤어진 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다. 교육에 열성이던 엄마가 중소도시로 이사를 주장했고 고향을 떠나면서 나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도시의 친구들은 고향 친구들과는 많이 달랐다. 무리에서 떨어진 나는 자연스럽게 혼자 시간을 보내는 법을 배웠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사춘기로 진입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