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현상으로서 무기력과 고통
어떤 현상에 대한 서술
어떤 사태나 나에게 현시되는 현상들을 재현하여 글로 외부화시키는 것에 흥미를 잃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어떤 직업의 요구에 순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에게는 신문기사와 같은 정치-사회적 사태들의 발발보다 나 자신의 고통의 역량에 따라 체감되는 무력감에 예속된 상태다. 이런 심정으로 본다면, 사회의 변화 가능성, 정치에 대한 무관심등이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 쉬워 보이지만 사회적 현상의 일부로 비친다. 왜냐하면 오직 개인만의 내재적 고통은 없으며 사회적 관계의 매개 속에서만 해석의 여지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고통과 무관심, 무기력의 근원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자기 정당화가 아니라 해석, 삶의 단편들이 아닌 사회와 구조의 단편들에 초점을 맞춰 해석해 나갈 기회이다. 가령 누군가가 대인관계에서 고통을 받는다 하면 그것이 꼭 그 두 존재의 관계로만 정의 지어질 문제는 아니다. 왜 갈등을 겪게 되는 구조였는지, 관계란 무엇인지 사유하게 될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의 가속주의, 이것은 모든 일정과 과정을 합리적으로, 효율적으로 시간에 맞기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관조는 부재할 수밖에 없으며, 고통을 일부로 수용하는 과정의 방해가 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의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은 다른 고통으로 덧 붙이기이다. 그러하다면 고통의 상대성과 시간성 덕분에 그전의 고통은 의식되는 횟수가 줄 것이다. 하지만 실재로는 그러한 고통의 잔여는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두가 모른다. 고통의 정의도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감각한다면, 이 현재의 상태를 고통으로 지칭할 수 있을 때는 고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를 회상하며 "그때 지금 생각해 보니 고통이었네..." 이런 말을 한들 과거에 대한 불확정한-현재에서 재구성된-표상일 뿐이다. 과거를 회상해도 과거에 대한 관념은 이미 현실에서 생산된 것이기에 과거의 고통 따위는 없다. 지금 이 순간만이 고통이다. 고립된 관계의 항들, 스펙터클의 시대로서, 신자유주의의 시대로서 우리는 모나드화 된다. 하지만 이런 말도 현상을 확정 지어 단편화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사회적 변화의 부재는 노동 착취이다. 노동자들(비물질 노동자, 육체 노동자등)이 자유시간 혹은 퇴근 후의 휴식에서 책을 읽거나 사유하기 위한 노력을 하려면 엄청난 체력이 요구된다. 그들은 체력이 없기에 더욱 소진된다. 사유할 힘의 저하는 미디어를 통해 한층 심화된다. 숏츠와 같은 넘김의 시대에서 자신을 재상산 하는 것이 불가능한 인간의 상이 재탄생한다. 소진된 상. 모든 인간의 표준의 불구화. 잉여 노동을 하며 일해도 받는 임금 정해져 있다. 잉여 노동으로 생산된 가치들은 전부 자본 축적과 자본가들, 기업가들의 몫에. 그들이 사회의 악이라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그것을 추동시키며 자본이라는 것이 그것을 증식시킨다. 대부분은 자신을 상품화시킬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살며, 그러한 무기력감은 소비주의적 쾌락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창조적 생산의 부제를 소비로, 다시 순환되는 구조로 환원하기. 바깥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 구조의 밖을? 외부와 내부가 존재한 것처럼 상상을 해도 내-외부는 모두 혼종적으로 뒤섞여 날뛴다. 가능성은 포착되지 않는 혼돈 속에 장식되어 있다. 우리는 포착할 수 없으며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자신의 고통을 어떤 특정 이념과 인물에게 종속시키기. 대부분은 스펙터클의 사회, 이미지에 의해 매게 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을 다시 재정의한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원자화된 인권과도 같은 개념들이 자신을 다시 종속시키는 지점에서 그들은 이러한 것을 통해 매개된 관계들로서 환의를 느낀다. 하지만 사람들 간의 합치 혹은 공통의 모임은 이질적인 것의 장이 아닌, 동일시의 관념적 형태의 외면화일 뿐이다. 이질적인 것이 공통을 만들어야만이 집단주의적인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령, 어떤 직업, 대학을 가고 가져야 한다든지 누군가가 경험을 더 오래 하였으니 너는 이렇게 안 하면 후회할 거라든지 등등... 사실 대학을 가야 한다는 편견은 기업에 예속된 논리이며 착취의 정당화와 비슷하다. 그리고 직업의 일의성은 또한 배움의 영역이 이질적이기보다는 제도권 내에서의 교육이 그러하듯 공통된 지식만을 암기하게 하기에 그런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집단주의적 현상들은 개인을 더욱 그 집단에 예속시키거나 집단에 속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개인에 대한 자의적 혹은 권위적 배제가 일어나게 만든다. 이러한 현상은 계몽화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대중의 계몽화는 이상주의적 이데올로기다. 사회 구조의 변화 자체가 대중의 이질적인 욕망의 구조도 변형시킨다. 우리는 모든 인과적 원인을 자신에게 종속시킨다든지, 허무주의적 소비주의로 빠지는 현상들을 그저 문화적 시각에서의 개개인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러한 현상들을 생산해 내는 구조 자체를 이질적으로 해석하여 해체시켜야 한다. 전략적 가능성은 이질적인 해석 등의 총체로서 잉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