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티안 하프너 – 궤도이탈을 기록한 차가운 관찰자

궤도를 지킨 사람들

by 고정희

세바스티안 하프너(27.12.1907 ~ 02.01. 1999)의 본명은 라이문트 프레첼(Raimund Pretzel)이었다. 베를린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죽은 베를린의 지성이었다. 20대에 법학을 공부하고 촉망받는 법조인이 되었으나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자, 법원과 검찰청에서 벌어지는 유대인 박해와 광기를 목격한다. 그 '미친 궤도'에 올라타지 않기 위해 1938년 유대인 약혼자와 함께 영국으로 망명한다. 세바스티안 하프너라는 필명은 이때 탄생했다. 모차르트의 하프너 교향곡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름을 바꾼 것은 가족이 독일에 남아있었기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지만, 동시에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오직 '진실의 기록자 하프너‘로 거듭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하프너 교향곡은 힘차고 경쾌하다. 그렇게 힘차고 경쾌하게 새 삶을 시작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세바스티안 하프너의 "어느 독일인의 기록" 표지.

영국 망명 초기에는 물론 언어 장벽과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다. 곧 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하프너는 영국 외무성에서 반나치 선전 활동을 돕다가 1941년부터 영국의 일간지 옵서버 The Observer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저술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망명 초기에 쓴 „어느 독일인의 기록“은 2000년도에 유고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회고록이지만 한 시대의 목격자로서 어떻게 히틀러가 가능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명료하게 서술한다.


1954년 그는 옵서버 특파원이 되어 베를린으로 돌아간다. 귀국의 가장 큰 이유는 언어였을 것이다. 글 쓰는 사람에게 언어는 숨 쉬는 공기와 같다. 아무리 외국어에 능숙하다 하더라도 모국어를 대체할 수는 없다. 1961년까지 옵서버의 베를린 특파원으로 일하다 독일 신문 디 벨트(Die Welt), 잡지 슈테른(Stern) 등 주요 언론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독일 현대사 분석가로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역사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고국 독일의 역사가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너무나 알고 싶어 했을 그 마음에 십분 공감한다.


그는 히틀러와 독일 현대사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담은 저서를 여러 편 집필했다. 그의 역사서는 어느 역사가의 글보다 예리하다. 히틀러의 생애와 “히틀러 현상”을 분석한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Anmerkungen zu Hitler, 1978) 등 모두 중요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프로이센의 역사를 다룬 „신화 없는 프로이센 (Preußen ohne Legende)“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


또한 1968년 처음에 „배신“이라는 제목으로 냈다가 후일 „독일 혁명 1918/19 “로 제목을 바꾸어 출간한 책은 그 예리함에 베일 정도이다. 하프너가 전달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는 바로 „1918/19의 혁명은 성공해야 했으며 배신했는가? “였다.


그는 사회민주당 지도부, 특히 프리드리히 에버트와 구스타프 노스케가 혁명을 배신했다고 전했다. 배신의 대상은 물론 그들을 지지하고 혁명을 일으켰던 독일의 노동자와 병사들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독일의 민주주의 자체를 배신했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리히 에버트가 독일 군부의 실권자 그뢰너 장군과 결탁하여 사민당 정부를 지지하는 대가로 혁명 세력을 억압하고 군의 기득권을 유지해 주기로 약속한다. 1차 세계대전을 초래한 군 수뇌부의 책임을 묻지 않고 오히려 그 수뇌부와 손을 잡았음에 하프너는 크나큰 역사적 배신을 보았다. 그에 더 나아가서 사민당과 군은 소위 자유군단 Freikorps이라 일컬어지던 극우 민병대까지 동원하여 노동자들의 봉기를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잔인하게 살해당했는데 하프너는 이를 동지 살해이며 혁명의 살해였다고 일갈했다. 자유군단은 후일 나치의 행동부대로 흡수된다.


이 배신의 결과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했으며 공화국 탄생 단계에 이미 나치 파시즘의 씨앗을 품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하프너는 독일의 불행은 1918년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혁명이 배신당했기 때문이라고 고발했다. 하프너는 이 '배신의 기록'을 통해 독일인들이 외면하고 싶었던 부끄러운 진실을 직시하게 하고자 했다.


그러나 하프너의 배신은 오랜 세월 외면받거나 비판받았다. 독일인들은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민중을 배신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라는 하프너의 분석에 승복할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2019년 혁명 100주년을 기점으로 비로소 독일 사학계의 기류가 완전히 바뀌었으며, 결국 하프너가 옳았다고 재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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