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마음과 미소의 궤적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마음의 준비 없이 쑥 들어간 방에서 네페르티티를 만났다. 거기서 그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 베를린 신박물관 이집트 관에서의 일이었다. 수년간에 걸쳐 리모델링을 마치고 2009년 다시 오픈했는데 그래서 가 본 것이 아니라 이집트 박물관에 다른 볼 것이 있어서 갔다가 우연히 마주쳤다. 작은 향병과 긴 방의 벽을 가득 채운 “사자의 서”를 보러 갔었다. 방이 끝나는 곳 오른쪽에 문이 하나 열려 있었다. 그 안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다. 들어섰더니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네페르티티. 그런 충격에 가까운 느낌은 온전히 전시 방법 덕분이다. 둔해 보이는 베를린 사람들이 박물관 전시 하나는 정말 잘한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사례가 네페르티티 전시관이 아닐까? 방 하나를 온전히 그녀에게 바쳤다. 들어서면 그녀의 옆모습과 마주치게 배치했다. 방 전체 조명은 어둑어둑하고 오로지 그녀의 흉상이 있는 유리장만 은은하게 불을 밝혔다.
3,500년의 세월을 건너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저렇게 살아 숨 쉬는 것 같을까. 아름다움은 둘째치고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더 충격이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느낌이 생생하다.
정신을 좀 차리고 나자 그다음 떠오른 생각은 “저 여인이 왜 여기에 있지?”였다. 그때까지 나는 네페르티티가 서베를린에 있는 줄 알았다. 이집트 관이 있는 소위 신박물관은 동베를린에 속해 있었다. 아니 여러 박물관이 모여있는 박물관 섬 자체가 몽땅 동베를린에 있었다. 2차 대전 때 신박물관 - 신박물관이라 해도 1855년에 개관했으니 오래된 것인데 그보다 더 오래된 박물관이 있어서 그리 불린다. - 이 폭격을 맞아 심하게 파괴되었다. 동베를린의 소유가 되었지만 여력이 없어 복구를 제대로 못하고 미적거리던 중에 통일이 되었다. 통일이 되고서도 거의 십 년이 지난 1999년부터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09년 드디어 오픈을 했다. 그리고 서베를린의 작은 박물관에서 이리로 옮겨진 것 같았다.
물론 그 뒤에도 여러 번 찾아가 봤다. 아름다움은 여전하지만 숨이 멎을 듯한 느낌은 더 이상 없다. 그저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물음을 던지는 듯하여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다. 보일 듯 말듯한 입가의 미소 때문일까? 무엇을 묻고 싶은 걸까?
최근 들어 네페르티티 반환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아마도 지난 11월 1일에 개관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카이로 대이집트 박물관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집트 국내외에서 약 21,000명의 서명을 받아 베를린에 다시 청원을 넣었다. 네페르티티가 베를린에 있는 것은 불법이며 카이로의 대 박물관에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 청원을 주도한 인물은 전 이집트 고고유물청장 자히 하와스 Zahi Hawass다. 유명 인사다. 그는 지난 수십 년간 지치지도 않고 이집트 유물을 반환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중에 네페르티티도 속했는데 베를린의 프로이센 문화재단은 당시 유물의 분배가 ‘적법’했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네페르티티의 흉상은 1912년에 12월 6일 고고학자 루드비히 보르하르트 팀이 발굴했다. 보르하르트는 프로이센 황제의 비호 하에 독일 동양학회(DOAG)를 세우고 이집트 당국의 허가를 받아 아마르나 Amarna 시 폐허의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아마르나는 그 유명한 종교 혁명의 파라오 아크나톤이 세운 도시였다. 발굴 작업의 모든 비용을 지불한 제임스 시몬은 베를린의 부유한 유대인 사업가였다. 발굴 작업이 마무리되자 약속한 대로 카이로의 이집트 박물관과 제임스 시몬이 발굴품을 나눠 가졌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당시엔 그렇게 했다.
‘분배 프로토콜’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에 따르면 발굴한 독일 동양학회(DOAG), 즉 물주 제임스 시몬과 이집트 당국 간 발굴 유물 분배 과정에서 이집트 측이 먼저 유물을 선택했으며, 네페르티티의 흉상은 독일 몫으로 배정된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당시 이집트 고고학 감독관이 유물을 분명히 검토했다고 독일 박물관 측은 강조한다. 이집트 측은 그때 독일 측에서 유물의 진정한 가치를 숨겼다고 주장한다. 보르하르트가 사기를 쳤다는 것이다. 사실 완전히 근거가 없지는 않다. 보르하르트가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네페르티티의 아름다움을 감추기 위해 전전긍긍했음을 알 수 있다. 어쨌거나 그걸 못 알아보고 내어 준 이집트 쪽 책임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도덕적, 정치적 물음에 대한 정답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도 불리는 네페르티티는 “베를린의 얼굴”이기도 하다. 미시즈 베를린이 하필 3500세가 넘은 외지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짐짓 모른 채 한다. 아니 오히려 베를린답다. 따지고 보면 베를린 시민들 자체가 외지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가? 2025년 현재 170여 개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북적이며 함께 사는 중이다. 거의 유엔 수준이다.
베를린은 또한 역사적 파편으로 이루어진 도시다. 전쟁과 붕괴, 분단과 재건, 혁명과 몰락, 새로운 시작.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하며 수많은 상흔을 얻은 도시. 그 속에서 박물관의 유리장에 곱고 안전하게 자리 잡은 네페르티티는 170여 개국에서 온 시민들 뿐 아니라 시대의 균열을 봉합하는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늦깎이 제국으로 유럽의 무대에 뒤늦게 등장한 프로이센 황제의 문화적 야망과, 20세기 초 유럽 제국주의 사이의 경쟁의 역사가 지금 새삼스럽게 아프게 한다. 박물관을 통해 세계를 분배하고 재구성하고자 했던 유럽 강국의 도시들. 네페르티티는 단순히 “옮겨온 유물”이 아니라 베를린이 드디어 세계와 맺은 관계, 그 자체였다.
당시 이집트는 늙은 오스만제국에 속했고 사실상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다. 이슬람 국가로서 오스만제국은 고대 이집트의 유물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독일 고고학의 천국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영국의 통제를 받았으나 이집트 박물관만큼은 프랑스가 주인 행세를 했다. 요지경 속이었다. 독일은 뒤늦게 발굴에 뛰어들었지만 눈부신 성과를 보였다.
발굴된 지 일 년 만에 네프레티티는 베를린에 입성했다. 그녀의 입성은 그 옛날 클레오페트라가 로마에 입성했던 것에 맞먹는 대사건이었다. 다만 요란한 퍼레이드와 함께 입성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나무 상자에 담겨 제임스 시몬의 저택으로 옮겨졌다가 베를린 박물관으로 갔다. 거기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채 10년을 기다렸다. 그리고 1923년 드디어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쉬쉬한 이유는 뻔했다. 너무 아름답기에 공개하면 이집트 쪽에서 “잠깐, 그게 그런 명작인 줄 몰랐는데! 반환하시오”라고 주장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때부터 프랑스를 통해 반환 요구가 시작되었다. 황제가 물러나고 공화국이 되면서 제임스 시몬도 “그래 이집트로 가는 게 맞는 것 같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던 중 나치가 집권을 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네페르티티에게 반했다. “반환은 절대 안 된다.” 온 유럽에서 예술 작품을 쓸어 모았던 나치들이 기왕 베를린에 있는 네페르티티를 돌려줄 리 만무했다. 그래서 그녀는 베를린에 남게 되었다. 지금은 아무도 히틀러 덕에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동안 잠잠했다가 최근 카이로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박물관이 완성되면서 다시 반환 요구가 시작된 것이다. 네페르티티의 귀환 논쟁이 반복될 때마다 베를린은 불편해한다. 이 도시는 스스로를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도시로 여긴다. 그럼에도 ‘적법’이라는 극히 독일적 답변으로 일관한다. 다른 유품들은 솔선해서 반환한다. 그렇다면 본심은 다른 데 있을 것이다. 네페르티티와 차마 작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베를린은 자신의 상처를 숨기지 않는 도시다. 오히려 그것을 기념비로 만들고, 기록으로 만들고, 박물관의 벽으로 만든다. 사라진 것들을 다시 보여주고, 이미 없어져 버린 시간의 잔해를 전시함으로써 도시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탁월하다.
신박물관 내 이집트관의 네페르티티 방 역시 그 기술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넓지 않은 공간, 낮은 조명, 오직 하나의 조각만을 위한 침묵. 베를린은 이렇게 단 하나의 유물을 통해서도 시간의 층위를 드러내고, 도시의 과거를 이야기하며, 현재의 자신을 다르게 바라보게 만든다.
베를린은 예술 작품을 “소유”하기보다 자기 서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이해한다. 페르티티는 그 서사의 중요한 축이다. 이 도시는 그녀를 통해 자신의 제국주의적 과거와, 그 과거가 남긴 아름다움과 상처를 함께 바라본다.
이렇게 반환 논란을 지켜보던 중, 어느 날 문득 그녀가 내게 던지곤 했던 물음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음이 왔다. 그 깨달음은 “왜 사람들은 이 걸작을 만든 조각가에 대해선 궁금해하지 않지?”라는 물음과 함께 왔다.
미켈란젤로나 로댕의 작품들은 작품의 이름보다는 조각가를 먼저 기억하면서도 네페르티티의 흉상을 만든 투트모시스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세월 탓일까? 아니면 고대 유물을 대하는 기본 태도가 그러한가? 유물에 얽혀 있는 복잡한 서사 때문일까?
네페르티티는 조각가 투트모세의 작품이다. 그는 종교개혁을 단행한 파라호 아크나톤의 수석 조각가였다. 아크나톤이 새로 설립한 수도 아마 르나에 그의 공방이 있었다. 그는 왕비의 모습을 돌에 새기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엇을 느꼈을까? 나는 문득, 투트모세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그의 아틀리에에서 발굴된 다른 작품들은 모두 습작이나 스케치 수준이다. 완성된 작품은 이미 궁전이나 신전으로 보냈을 테니까. 그런데 왜 하필 완성도가 가장 높은 네프레티티의 흉상 만이 그의 아틀리에에 남아 있었을까? 고고학자들은 어디 선반에 있다가 아틀리에가 무너지면서 떨어져 모래에 파묻힌 것 같다고 말한다. 그가 혹시 왕비를 깊이 흠모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스스로를 위해 연인의 흉상을 만들지 않았을까? 그리고 선반에 고이 모셔두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모두 짐작이다. 그러나 3,500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여전히 살아 숨 쉬며 보는 사람에게 물음을 던지는 것은 결국 투트모세의 깊고 내밀한 사랑이 아닐까? 모든 명작이 그렇지 않나?
네페르티티의 흉상이 앞으로 어느 도시의 어느 박물관으로 가게 될지 아직 미지수이다. 어디에 있건 그녀는 늘 질문을 던지는 존재로 남을 것이다. 석상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질문은 결국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다. 그녀의 미소를 통해 투트모세의 깊은 마음을 내 마음에 담는다면, 그때는 작별할 수 있지 않을까?
©고정희/202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