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 우리는 곰이다!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흑곰

by 고정희

베를린을 상징하는 동물은 곰이다. 베를린처럼 상징 동물을 열심히 챙기는 도시가 또 있을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금곰상, 은곰상 트로피를 손에 쥐고 환하게 웃는 스타들을 통해 곰도 덩달아 세상에 알려졌다. 그 외에도 도시 곳곳에서 만나는 곰친구 『버디베어 시리즈』로 인해 베를린 곰은 이제 세계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해도 좋겠다. 현재 약 500 마리의 곰친구가 베를린 요소요소에 서 있고 친선 대사의 신분으로 해외에서 활동 중인 곰친구들이 약 1천8백 마리다.


왜 하필 곰일까? 사자나 독수리가 더 멋지지 않나? 그런데 곰이 가장 힘센 짐승이어서 좋단다. 힘세고 용감하고 자제력이 커서 좋단다. 하늘을 나는 독수리는 독일 전체의 상징이기도 하고 베를린이 지리적으로 속해 있는 브란덴부르크주의 상징이기도 하다. 프로이센은 쌍독수리 깃발을 휘날렸었다. 독수리는 날아가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땅에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선 곰은 듬직하다. 곰의 두툼한 털옷은 푸근해 보인다. 사자는 사실, 될수록 멀리하고 싶은 맹수가 아닐지.

베를린에서 곰의 형상을 곳곳에서 만나다 보니 일상이 되어 버렸다. 베를린답다. 멋진 것보다는 일상적인 것을 찾는 사람들.


베를린 일대가 숲으로 뒤덮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숲 속에 곰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사람과 곰이 함께 산 형국이었다고도 한다. 곰이 사라진 것이 대략 200년쯤 되었다고. 사냥도 많이 했지만, 그보다는 도시의 건설로 서식처가 점점 좁아지자, 숲을 따라 동쪽의 체코나 루마니아, 러시아로 이전해 갔다. 그곳의 숲에는 지금도 많은 곰이 서식하고 있다.


베를린이라는 이름이 혹시 곰(베어)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한다. 베를린은 옛날 슬라브어로 늪지를 말한다는 것이 언어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처음에 늪이었던 베를린을 개간하기 시작한 것이 슬라브인들이었다. 이후 게르만족이 들어와 살면서 슬라브인들을 동쪽으로 밀어냈다. 그 게르만의 후예 중에 알브레히트라는 용맹한 기사가 있었다. 12세기에 브란덴부르크주를 평정하고 변경백으로 성장시킨 인물이다. 그 공을 인정받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곰’ 알브레히트(Albrecht der Bär)라고 불렀다. 그가 곰이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실제로 곰과 맞서 싸워 이겼다고 말하고, 또 다른 이들은 그의 문장에 곰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다만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그의 강인한 불굴의 성격을 곰에 비유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알브레히트가 활약하던 시기엔 아직 베를린이란 도시가 형성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베를린과 직접적 관계는 없다. 다만 브란덴부르크 지역을 평정함으로써 향후 베를린이 발전할 수 있는 정치적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므로 베를린 사람들이 그를 특별히 기억하는 것이다.


곰과 독수리 – 시민과 영주의 세력다툼


곰이 베를린의 문장에 처음 등장한 것이 1280년이다. 그때 모피 장인 길드의 인장에 독수리와 함께 새겨졌다. 독수리는 브란덴부르크주를 다스리던 영주 가문의 상징이었다. 그 독수리를 중앙에 두고, 양쪽에 곰 두 마리가 갑옷을 입고 서 있다. 이 길드 문장은 베를린 곰의 출생증명서인 셈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출생부터 귀족 가문이 아니라 시민의 상징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이후 문장이 여러 번 바뀐다. 그때마다 독수리와 곰의 관계도 엎치락뒤치락한다. 즉, 시대별로 문장을 살펴보면 시민과 영주와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유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338년에 제작된 문장은 곰이 독수리가 새겨진 깃발을 목에 걸고 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독수리 깃발이 곰에게 끌려가는 형상이다. 아직 영주들의 영향력이 시에 널리 미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영주들은 변방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늘 전장을 떠돌며 살았고 그사이에 상인과 공인들이 도시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1280년 인장. 독수리 양쪽에서 곰 두 마리가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Public Domain.


1440년 이후 프리드리히 2세 선제후가 즉위하며 상황은 달라진다. 우리 고려대에 광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호족들을 잡도리했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 영주의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베를린 시민들을 옥죄기 시작한 것이다. 시의 자주권을 하나둘씩 박탈하고 한자 동맹 회의 참여를 금지했다. 부유한 상인으로 구성된 상류층의 입지를 불리하게 하고 시민 계층 사이의 이간질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 제대로 일이 터진 것이 1448년이었다. 선제후의 궁전 건설을 두고 베를린 시민들과 크게 충돌한다. 프리드리히 2세 선제후는 독하기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오죽했으면 별명이 철이빨 Eisenzahn이었을까. 그는 베를린 중심가에 있던 자신의 거처를 헐고 큰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수도라는 개념이 없었다. 영주들은 자신의 영토 곳곳에 몇 개의 본거지를 두로 늘 떠돌았기 때문이다. 베를린이 속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베를린 동서 쪽 끄트머리와 중앙에 각각 요새를 짓고 번갈아 가며 살았다. 그러다가 프리드리히 2세가 처음으로 베를린 중심에 궁전을 짓고 들어앉을 생각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변의 영토 문제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는 뜻이다.


다만 여태 독자적으로 살림을 꾸려왔던 베를린 시민들에겐 전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시민들이 세운 시청사 건물 바로 코 앞에 궁전을 짓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크게 짓기 위해 시민들에게 토지를 빼앗기까지 했다.


궁전 건설을 방해하면 생기는 일


베를린 시민들은 독재의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방해 공작을 펼쳤다. 선제후의 재판관을 사로잡고 선제후의 거처에 침입하여 문서를 일부 파괴했다. 그리고 궁전을 짓기 위해 쌓았던 강둑을 헐어 한창 건설 중인 궁전터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건설에 필요한 돌이며 목재, 그리고 연장이 모두 물에 쓸려버렸다. 시민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은 “베를린의 불만(Berliner Unwille)”이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짜하게 퍼지고 역사에 길이 남게 된다.

프리드리히 2세는 대로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는 군사력이 있었다. 600 명의 중무장한 기사들을 사열시키며 위협했다.


결과는 안타깝게도 선제후의 승리로 끝났다. 그때 열린 중재 재판에서 그때까지 누렸던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일부 반납하는 절충안이 마련되어 문서로 확정했다. 궁전 물바다 사건에 가담한 시민들에게는 벌금이 부과되고 봉토를 몰수했으며 주동자들은 추방되었다.


이 사건은 제후가 시민계급에 대해 거둔 최초의 완전한 승리였으며, 이를 계기로 다른 제후들이 도시의 자치권을 억압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후에 나온 문장을 보면 독수리가 곰의 등에 올라타고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날개를 펴고 있다. 이 문장은 대략 1700년경까지 사용되었다. 브란덴부르크의 독수리와 베를린의 곰이 공존하는 모습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베를린 불만 사건 이후 만들어진 인장에서 독수리가 곰의 등을 타고 의기양양하고 있다. Public Domain.

1709년 베를린이 프로이센의 수도가 되었을 때 만들어진 문장을 보면 프로이센과 브란덴부르크의 쌍 독수리가 나란히 자리 잡고 그 아래 목걸이를 차고 길든 모습의 곰이 묘사되었다. 이제 시민계급은 길든 곰으로 그 운명이 결정되었을까?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다.

1920년 베를린 광역시가 탄생하면서 독수리를 떨쳐버린다. 베를린의 문장과 프로이센의 문장이 구분되면서 이제 곰은 독존한다. 일어서 있는 자세로, 붉은 혀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모습으로. 후일 1954년, 이 발톱에 빨간 매니큐어를 칠해준 것은 오트프리드 노이베커 Ottfried Neubecker라는 문장 디자이너였다. 그가 디자인한 문장이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베를린 불만 사건이 있은 후 베를린의 정체성도 달라진다. 상인과 장인이 건설한 도시 베를린에서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으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게 된다.



Berliner_Baer.svg.png 오트프리드 노이베커 Ottfried Neubecker 가 칠해 준 빨간 매니큐어의 베를린 흑곰. Public Do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