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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보라 Mar 11. 2021

페미니스트인데, 한드를 아직 본다면? 이 책을 꼭...

[리뷰] <페미니스트입니다만 아직 한드를 봅니다>(탐탐, 2020)

드라마 보는 걸 좋아한다. 그것도 미드나 일드처럼 해외 드라마가 아니라 한국 드라마. 한드를 좋아한다.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1년에 3~4편 정도씩은 꼭 푹 빠져버리는 드라마가 생겨버린다.  

    

“월화-수목 미니시리즈와 주말드라마의 편성표를 외우며 한국드라마를 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한드’를 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페미니스트입니다만 아직 한드를 봅니다 - 한국드라마에 여전히 기대하는 당신을 위한 이야기>(이하 ‘페아한’) 책 소개 글에 나오는 이 부분을 보고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한드를 보는’ 사람. 프롤로그를 더 읽어보자.      


“이들은 말합니다. 장르 불문 ‘기승전-연애’ 구조, 구원을 기다리는 캔디형 여주인공, 사랑과 폭력을 구분 못하는 남주인공, 비이성의 적대를 반복하는 여성 캐릭터들, 사랑의 완성은 결혼, 여성의 희생과 복종을 강요하는 시월드, 인내·효도·출산으로 완성되는 정상 가정 등 ‘한드’를 ‘한드답게’ 만드는 설정들에 더 이상 설레지 않고, 어쩌다 설레더라도 찜찜함이 남기에 더 이상 ‘한드’를 예전처럼 볼 수 없다고 말이죠.”     


음... 이것이 한드의 현실이기도 한데, 사실 위의 문단에 나온 설정은 견디기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런 설정이 없거나 적은 드라마들만 찾아서 본 편이다. 예를들어 절대 안 보는 드라마라면, KBS 일일드라마. ’한드답게 만드는 설정‘들이 가득하다. TV도 없는 판국에 굳이 웨이브(wave)까지 결제해서 그런 드라마를 찾아볼 이유는 없으니까 안 본다.      


그러나 지상파, 종편, tvN에서 하는 미니시리즈에서도 아직 현실을 따라가지 못 하고, 뒤처지는 설정을 여전히 답습하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하지만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 한드도 조금씩 더디지만 변화하고 있습니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의 능력 있고 일 잘하는 여성들인 타미와 현, 가경은 최고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이와 향미, 그리고 옹산의 여성들은 서로를 지키며 연대해 여성들을 위협하던 지질한 여성 혐오 범죄자를 처단합니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제희는 그동안 드라마와 언론이 강요하던 ‘피해자다움’을 보란 듯 내던지고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듯 한드에도 조금씩 다른 여성 서사와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동백꽃 필 무렵>! 재작년 그리고 지난해에 열심히 봤던 드라마라서 더 반가웠다. 그리고 ‘맞아, 이런 요소들이 있어서 더 재미있게 드라마를 봤지’라는 생각을 했다.       



책의 구성을 설명하자면, [1장. 이 캐릭터, 끌리는데?]과 [2장. 이 드라마의 여성서사]에서는 한드 속 돋보이는 여성 캐릭터와 여성 서사를 짚어낸다.      


[3장. 우리들의 수다]에서는 세 번의 수다회가 나온다. 전·현직 미디어 전문 매체의 기자들과 대중문화 전문 기자, 미디어 연구자, 미디어 인권·법 제도 개선 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이 특정 주제를 두고 함께 나눈 수다가 담겨 있다. (나 또한 <tvN의 ‘착한 드라마’, 누구한테 착한 드라마일까> 수다회에 참여했다.) 4장에서는 수다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쓴 드라마 추천 글이 있고, 마지막으로 에필로그가 나온다.      


더디지만 변화하는 모습들을 제대로 짚어내고 잘 변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도 비평의 역할이지 않을까. <페아한>에서는 그 지점들을 제대로 짚어내준다. 그래서 속이 시원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수다회에서 나눴던 심도 깊으면서도 살아있는 이야기도 볼 수 있고, 여러 사람들의 리뷰까지도...! 손바닥만한 사이즈의 책이지만 꽤 두껍다. 그런데 또 가볍다. 가격도 9,900원. 이렇게 내용이 다채롭고 알찬 책의 가격이...! 여러 권 사서 주위 친구들에게 나눠줘도 될 가격...!      


이 책을 쓴 작가는 두 사람. 미디어 전문 매체의 전직 기자이자 언론단체 전·현직 활동가인 두 선배, 김세옥 선배와 권순택 선배가 함께 만들었다.      


책을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그 소식을 전해들었기에 기대하고 있었다. 텀블벅에서 펀딩을 할 때에도 기대했는데, 책이 나오자 너무 반가웠다. 책을 나왔을 시점에 한 번 읽었지만 이번에 리뷰를 쓰면서 다시 펼쳐들었다.      

불과 몇 달전의 내가 읽었던 흔적들. 줄이 그어져있거나 접혀 있고, 포스트잇 붙여져 있는 부분을 보며 한 번 더 공감했다. 인상깊었던 지점들이 너무나도 많지만, 전부 옮길 수는 없기에 최대한 살짝만 적어본다.      


1장에서 가장 인상깊게 읽은 글은 [불편한 용기가 필요해, 박차오름]. 2018년 방영한 JTBC <미스 함무라비>에 대한 평이다. 이 드라마를 보지 않았지만, 글을 읽으며 충분히 어떤 드라마인지 느낄 수 있었다. 읽고나니 이 드라마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박차오름은 주저 없이 말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그녀도 두렵다. 집에는 빚이 있고, 엄마는 아프다. 사실상 가계의 책임자인 박차오름은 먹고 살기 위해 반드시 법원 조직 안에서 살아남아야만 한다. 그런데도 옳지 못한 일은 옳지 않기에 목소리를 낸다. “그런 주제에 제가 너무 일을 많이 벌이죠? 저도 무서워요. 살아남지 못할까봐.”     


용기는 낼 만하니 내는 게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낼 수밖에 없기에 용기다극의 마지막 박차오름의 용기는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의미 있는 연대의 첫발을 만든다.’(44~45)      


문장을 읽으며 감탄했다. “용기는 낼 만하니 내는 게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낼 수밖에 없기에 용기다.” 이 문장... 얼마나 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있었을까. 누군가가 용기를 낼 때 그 곁에 같이 있어주거나 목소리를 내 주는 이야기, 역시 뭉클하고 멋지다. 이런 드라마 또 어디 없나...   

   

[2장. 이 드라마의 여성 서사]에서는 [드디어 등장한 ‘일하는 여성’] 편이 흥미로웠다. 이 글에서는 tvN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tvN <로맨스는 별책부록>, 넷플릭스 <킹덤 시즌 1,2>에 대해 다뤘다.      


‘그런 유경에게 레스토랑 사장 김산(알렉스)이 묻는다. “주방에서 일도 하고 사랑도 하고 두 마리 토끼 다 잡고 싶어?” 유경이 답한다. 두 마리 토끼가 아니라토끼가 두 마리가 아니지일하는 토끼가 사랑도 하는 거그런 거 아닌가?”

  실력 있는 요리사로서 성장을 원하는 서유경과 좋아하는 상대와 연애하는 서유경은 선택이 필요한 두 자아가 아닌 하나의 자아로서 존재하며 당연히 존재할 수 있다. 그 당연함을 굳이 질문하는 남성에게 유경이 그게 왜 질문거리가 되는지 모르겠다며 덤덤하게 묻는 장면은 그래서 중요하다.      

 여성 또한 성취를 위해 일하는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건 거창한 입증이나 선언이 필요한 명제가 아닌 ‘상식’임을 말하기 때문이다.’ (62)


MBC 드라마 <파스타>에서 나온 대사가 인용되었다. 두 마리 토끼가 아니라토끼가 두 마리가 아니지일하는 토끼가 사랑도 하는 거그런 거 아닌가?”. 그러게, 남성들에게는 “일이야, 사랑이야?” 묻는 이가 없는데 일하는 여성에게는 왜 굳이 그런 질문들을 한 걸까. ‘2010년 드라마니까 그럴 수도 있지’일까. 글쎄. 11년이나 지난 2021년에도 여전히 여성들은 이런 질문을 받는다. (실제로 여성들은 회사 면접에서도 이런 질문들을 받고... 이는 최근에 뉴스에서 이슈화되기도 했다.) 너무나 당연한 상식을 드라마에서 계속 드러내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여성들도 권력을 욕망한다, 당연히!] 이 글도 강력추천!     


‘다른 삶을, 권력을 욕망하는 여성들의 삶이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 획일적으로 그려진다는 건 옳지 않다.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의 욕망에도 다양한 이유가 있고, 결과도 제각각 다르다.’ (101)     

‘이런 측면에서 서진을 비롯한 여성들은 가부장의 세계에서 완전히 패배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권력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싸운 서진과 스카이캐슬의 여성들이 극의 모든 순간을 좌지우지하고, 가부장의 세계를 무너트리지 못한 채 정신 승리에 가까운 행복을 거머쥐었을지언정 기억을 잃지 않고 죽지도 않고 자신들끼리는 행복하게 살아남았다는 건 안타까울지언정 분명한 변화다.’ (106)

          


3장. 언니들의 수다회는 정말, 책으로 꼭 보시길 바란다. 네 사람이 드라마와 드라마를 둘러싼 현실들에 대해서 나눈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것도 3편이나. 알찬 내용으로. 


4장. 언니들의 드라마에서는 [‘일하는 여성들에게 전하는 위로의 목소리 : KBS 회사 가기 싫어 시즌 1,2’]를 가장 공감하면서 읽었다. 원래 <회사 가기 싫어>를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배봉숙님의 이 글을 읽으며, 전부 줄을 긋고 싶었다...!      


‘KBS <회사 가기 싫어>는 우리가 노동을 계속해나가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의 고됨과 소중함을 말하는 드라마다. (중략) 구호가 아닌 다정한 위로의 목소리로 전한다.’(203)     


그리고 tvN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본 적이 없는데, 그 드라마에 대해서 쓴 [사랑스럽지 않아도 괜찮아](김고은)도 재밌게 읽었다. 여자 주인공이 다소 반사회적이고 사이코적인 성향이 있더라도, 그래도 그게 뭐 어떠냐는 이야기.      


‘멜로드라마의 여주인공이 항상 사랑스러울 필요도, 모두의 사랑을 받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있듯이 드라마 여주인공도 다양한 모습이어야 한다. 그러니 사이코여도 괜찮다고, 사랑스럽지 않아도 괜찮다고, 고문영에게 이 말쯤은 해주고 싶은 것이다.’(211)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도 정말 주옥같은 문장들이 수두룩하다. 왜 우리가 다른 외국 드라마도 아닌 한드를 보고, 그 한드의 변화를 주목하고 이야기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적혀 있다. 맞아요, 맞아! 공감하며 읽은 부분을 발췌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이런 변화를 주목하는 건 중요하다. JTBC 드라마 수다회에서 나온 얘기처럼 어떤 콘텐츠는 나쁘기 때문에 더 쉽게 조명받는 반면, 의미 있는 무언가를 담고 있는 콘텐츠는 모든 게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중략)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동시대를 살았고지금도 함께 사는 다양한 여성들의 수만큼 다채로운 여성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드라마가 필요하다물론 미국, 영국, 일본, 중국 등 세계 각국의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나누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같고 비슷한 문화와 정서가 지배한느 공간에서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을 더 알게 된다는 건, 그만큼 더 많은 공감이 가능한 동료들을 만나는 경험이기도 하다.      


이 경험을 더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 의미 있는 여성 서사에 대해그게 극히 일부의 의미일지라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동시에 한국드라마를 만드는 모든 주체들에게 계속 질문해야 한다. 가부장의 시선으로 여성을 속박하고 재단하며 학대하고 관음하는 태도를 즐거움의 요소라고 주장하기 위해 ‘창작(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는 게 부끄럽지 않은지 말이다. 그리고 요구해야 한다. 더 많고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내놓으라고 말이다.’ (221)      


+ 작은 바람. 책에 언급된 드라마를 만든 제작진들이 이 책을 보면 좋겠다. 자신들이 만든 드라마가 이렇게 멋진 평을 받고 있다는 걸 알고, 또 힘을 내어서 만들어주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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