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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전시 기행

장 미셸 바스키아 특별전

by 피터정

1960년 뉴욕 브루클린의 아프리카계 부부 사이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5세부터 어머니와 브루클린 미술관, 현대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꾸준히 방문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이는 8세라는 어린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비장절제수술을 받았다. 병원에 입원한 아이를 위해 어머니는 해부학책을 건넸다. 아마도 아이에게 자신의 몸을 이해하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 같다. 좀 특별한 경우 같지만 다행히 아이는 이 책을 좋아해서 열심히 보게 된다.


이때 어머니께 병원에서 받은 해부학책은 훗날 드로잉 작업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인 그림작업을 시작하며 이후 키스해링 등 성향이 비슷한 친구들과 어울렸다. 21세인 1980년 본격적으로 화가로 데뷔해서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내가 작가의 작품을 실제로 처음 만난 것은 LA의 '더브로드 미술관'에서였다. 작가와 함께 작품활동을 한 앤디워홀 등의 작품들과 함께 전시되었기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대부분 미술관의 작품들은 피카소 이전이나 이후 등으로 어느 정도 구분된다. 그의 작품들은 시대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서울의 DDP에서 2025년 9월 23일부터 2026년 1월 31일까지 전시 중인 '장 미셸 바스키아 특별전'을 보았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적 기호들'이라는 전시주제에 맞는 한국의 작품들도 함께 전시되었다. 회화가 주류를 이루었고 드로잉, 노트북 페이지 등을 포함한 220여 점의 작품과 다큐영상을 전시했다.

작품들도 일정한 형식이 없는 것 같지만 볼수록 그만의 독특한 형식이 있다. 다만 기존의 틀에서 많이 벗어났을 뿐이다. 그림도 독특하지만, 글이 많고 원색적이다. 아마도 정규교육이나 멘토의 사사를 받지 않고 나름대로의 스타일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이 정형화된 캔버스에 그렸지만, 그는 형식을 깼다.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티프 중 하나는 '해골과 가면'이다. 흑인인 그는 아프리카 가면에 매료되었다. 영적 상징성에 대한 그의 관심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대부분의 작품은 1980년대 제작되었고 그 시대의 뉴욕이라는 도시가 그를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벽에 그린 상징적인 낙서 같고 완성된 건지 확인하기 어렵다. 그림에 여백도 많고 작품명도 무제가 많다. '무제(피카소)'라는 작품은 마치 자신의 연구결과를 학회에 발표하는 포스터 같다.

전시 후반부의 '스케치 노트'를 보니 무지 스케치북이 아닌 줄이 있는 일반노트를 즐겨 사용했다. 그는 화가지만 글쓰기를 좋아했고 글도 그림의 일부로 인식했던 것 같다. 그림보다 글이 많은 것으로 보아 글로 작품의 아이디어와 방향을 정리해 나간 것 같다.

작품활동을 시작한 초반에는 공원에서 머물며 3달러가 없어서 밥을 사 먹지 못하는 현실을 그림으로 달랬다. 벽이나 부서진 창틀 등에 그림을 그리다가, 1달러짜리 엽서를 그려 팔기도 했다. 이후 돈이 생기면 캔버스를 사서 그렸다.

나름의 자기 세계를 만들었지만, 주변사람들은 그를 '그라피티 아티스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술가로 순수성을 끝까지 지켰으며, 자신의 과거를 부끄럽게 생각했지만, 당당히 예술가로 자신의 일을 했다.

어느 정도 유명해지며 조수들과 함께 작업했는데, 그는 혼자 작업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즉흥적으로 작업하는 방식을 고수했기 때문일 것 같다.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해골을 보면 메멘토모리가 생각난다. 그는 메멘토모리를 무의식적으로 의식한 것 같다. 어릴 때 엄마의 손을 잡고 자주 같던 브루클린미술관의 이집트 관련 유물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뉴욕에서 많은 경험을 했지만 결국 그가 그림으로 남긴 것은 자신의 머릿속 기억과 자신의 생각이었다.


그의 작품들과 영상에서 만나는 작가의 인터뷰에서 1980년대 뉴욕의 역동성을 느꼈다. 동시에 한 사람의 삶에서 어린 시절의 특별한 경험이 어쩌면 평생을 좌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전시장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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