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청주
나는 고등학교시절 미술반에서 특별활동을 했다.
인문계고등학교였으니, 대학입학이 가장 큰 목표였다. 당시 미술수업시간 만으로 나의 미술에 대한 갈증이 채워지지 않아서, 점심시간에 짬을 내 실기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미술선생님이 동양화 전공이라 자연스럽게 동양화를 배웠고, 신문지에 먹으로 연습을 많이 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면 하얀 한지에 그렸다. 당시에는 한지를 '화선지'라고 불렀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한국화와 동양화의 구분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동양화에서 한국화를 독립시켜서 구분하지만 당시에는 그냥 동양화라고 했다.
당시 동양화를 연습하며 선생님이 강조했던 특징이 지금도 기억난다. 먹의 농도를 잘 조절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농담'이라고 했다. 농담(濃淡)은 동양화에서 먹의 농도 변화를 뜻하며, 명암 표현을 통해 그림에 입체감과 깊이를 더하는 기법이다. 특히 수묵화에서 먹의 양 조절을 통해 다양한 분위기와 질감을 표현한다. '수묵화'란 채색을 하지 않고, 오직 먹으로만 표현하기 때문에 농담조절로 질감, 양감, 원근감 등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다가 수채화를 접하며, 색상, 주제 등을 더 자유롭게 표현해서 나름대로 좋았다.
수채화란 서양에서 유래했으며, 물감을 물에 풀어서 그리는 것을 뜻한다. 유화가 물감을 기름에 섞어서 하는 것과 구분되는 기법이다. 물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어서 오래전부터 서양화가들이 수채화로 가볍게 스케치처럼 그림의 시안을 만들고, 유화로 옮기는 작업을 했을 것 같다.
국립 현대미술관 청주 기획전시실에서 2025.3.21~9.7까지 전시 중인 '수채 : 물을 그리다'전을 보러 갔다. 제목처럼 수채화 전시라 마음에 끌렸다. 아마도 처음 보는 수채화 전시라 기억된다. 도슨트분도 이번전시가 현대미술관 개관 이후로 공식적인 수채화 전시로는 처음이라고 설명한다. 나의 기억이 맞았다.
수채화를 통해서 보는 한국 서양미술의 역사는 1990년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1884년에 국내 근대신문 한성순보에 1851년 영국 수정궁에서 전시된 수채화(수화)가 언급되었던 것이 시작이다. 이어서 1890년대 방한서양화가들이 조선의 풍경을 수채화로 스케치했다. 같은 시기 일본의 종군화가들이 국내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런 영향으로 1895년 정부가 서양식 교육제도를 채택하며 소학교령을 발표하고, 교과목에 도화가 포함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에는 서동진이 대구조양회관에서 최초의 수채화개인전을 열었다. "왜 하필 대구였을까?" 궁금했는데, 도슨트분의 설명을 듣고 의문이 풀렸다. 당시에는 대구가 지금의 서울처럼 번성했고, 교육열도 높아 일본유학을 가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이어서 1935년 이인선 작가가 22회 일본수채화전에서 '아리랑고개'라는 작품으로 최고상인 일본수채화협회상 수상했다. 당시가 일제강점기였던 것을 생각해 보면 파격적인 일이었다.
1990년대 이후 수채화 장르에서의 실험과 도전을 계속했고 이번전시는 34명 작가의 수채화 97 작품을 전시했다. 국내 현대미술관 4곳 중 1곳인 현대미술관 청주는 수장고센터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작품들이 미술관의 소장작 들이다.
많은 수채화 작품 중 '소'그림으로 많이 알려진 이중섭작가의 '물놀이하는 아이들'이 재미있다. 엽서만 한 작은 종이에 검정펜이 마르기 전에 물색으로 번지는 효과를 준 것이 수채화의 진수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로 일본에서 활동한 곽인식 작가는 '무제'라는 작품들을 통해서 종이뒷면까지 배어드는 효과를 활용하였다. 한지에 한국화와 수채기법을 실험적으로 표현했다. 1980년대의 그림 같지 않고 시대를 느끼지 못했다. 이외에도 유화 같은 수채화, 소묘 같은 정교한 수채화, 구상과 추상 등 다양한 한국작가들의 수채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 수채화가 도입된 지 100여 년이 지났다. 시대마다 기법들이 새롭게 발전하고 있음을 느낀다. 한국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한국 수채화 나름의 장르도 보인다. 이렇게 100여 년의 수채화 역사를 한눈에 보니 나의 어린 시절 수채화를 접했던 기억도 스쳐간다. 앞으로도 담백하면서 여백의 미를 넉넉하게 담은 '한국적 수채화' 작품들을 기대해 본다.
최근 수채화 기법을 응용한 어반스케치가 유행하는 것 같다. 디지털시대의 역행 같지만, 이번기회에 나도 관심을 가져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