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오직 예술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한다"
옮긴이의 해설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
옮긴이 이명현 교수
“창조되지 않은 창조물의 그림자”
여기 번역되어 소개된 시들은 브류소프의 초기 시들로서 그의 데까당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브류소프는 러시아 상징주의 그룹의 제1세대, 이른바 ‘연장자들’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그의 데까당적인 경향은 상징주의 1세대의 미학적 흐름을 대변한다. 데까당의 선두주자로서 그의 첫째가는 신조는 예술에 부과되는 모든 예술 외적 과제를 철저하게 차단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입장은 ‘자기가치적인 예술’이라는 슬로건으로 집약된다. 자기가치적 예술이라는 개념은 삶의 모든 실리와 공리를 따지는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원리가 예술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즉 예술은 비합리적인 원리, 객관적인 이성이 아닌 감성적 직관으로 운용되는 영역이며, 따라서 그것은 철저히 예술가 개인의 주관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이 같은 관점은 예술적인 미(美)와 예술가의 주관이 절대적 가치에 대한 신념을 수반한다. 브류소프의 시에 나타나는 예술미와 자아숭배의 경향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의 데까당적인 초기 시들은 주로 자기가치적 예술의 자의식을 표명하는 시들로써, 예술창조 자체를 주된 테마로 다룬다. 「형식에 바치는 쏘네뜨」와 「창조」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브류소프에 따르면, 예술(시)의 고유한 아름다움은 바로 그것의 형식미에서 비롯된다. 시의 형식은 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한 송이 꽃의 자태와 향기”와도 같이 “미묘하고도 강력하게 연관” 시킴으로써 한 편의 시를 “한 송이 꽃” 혹은 “다이아몬드”처럼 완성시키는 결정적인 인자(因子)이다.
그러나 형식을 갈고닦는 것, 시어를 벼리는 것은 어떤 대상을 명료하게 지시하거나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다. 시의 과제는 재현이나 서술이 아닌 ‘암시’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주의적 명제를 브류소프는 「창조」를 통해 구현해 보인다. 여기서 예술창조의 과정은 “에나멜 벽” 위에 흔들리는 “종려나무 잎사귀”의 그림자에 비유됨으로써 이성으로는 선명하게 포착할 수 없는 내밀하고 암시적인 어떤 것으로 제시된다. 창조 과정의 이러한 비밀스러운 속성은 예술적인 미(美) 자체의 속성과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창조되지 않은 창조물의 그림자”의 신비한 속성은 “창조된 창조물의 비밀”과 일치하는 것이다.
예술을 자기가치적인 것으로 절대시 하고 찬미하는 태도는 예술가의 유아론(唯我論)적인 자기 숭배와 직결된다. 「젊은 시인에게」 「나」 「좁다란 거리를 따라」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들에 등장하는 서정적 자아는 범인(凡人)들과는 변별되는 예술가이다. 그는 절대권력을 지닌 “황제”이자 더 나아가 신적인 존재이다. 브류소프에게서 예술 장조는 세계 창조에 버금가는 의의를 지니며, 따라서 예술가는 창조주―신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술적 ‘몽상’의 세계 안에서의 이야기이다. 즉 예술가―시인은 외부로부터 차단된 자신의 주관적 세계 안에서만 황제이자 신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상기해야 할 점은 브류소프의 자아는 완성된 예술작품처럼 완벽하게 조화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에서 보듯이 그의 자아는 온갖 모순과 혼돈을 포용하기에 예술창조의 능력을 지닌다.
만년의 브류소프 엿보기
위 이미지에 적힌 시는 발레리 브류소프(Valery Bryusov, 1873~1924)가 1922년에 쓴 <미래(Будущее)>라는 작품의 한 구절이다.
번역
미래는 소설 중 가장 흥미로운 것!.…
내게 읽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책…
안개층에 가려진 땅…
이제 막 건축이 시작된 신전…
작품의 배경 및 해설
1. 만년의 시상과 시대적 상황
이 시가 쓰인 1922년은 발레리 브류소프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으로, 그의 생애 끝자락에 해당합니다. 당시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새로운 사회 체제가 구축되던 격동기였습니다. 많은 동료 문인들이 망명을 택하거나 혁명에 반대했던 것과 달리, 브류소프는 혁명을 수용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입니다.
2. '미래'에 대한 은유
이미지 속의 시 구절들은 '미래'를 네 가지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흥미로운 소설과 읽을 수 없는 책: 삶의 끝에 다다른 시인이 자신이 직접 목격하거나 경험할 수 없는 '내일'에 대해 느끼는 강한 호기심과 동시에, 그것을 끝까지 볼 수 없다는 인간적 한계를 드러냅니다.
• 안개에 가려진 땅: 미래의 불확실성과 신비로움을 나타냅니다.
• 이제 막 건축이 시작된 신전: 이는 당시 러시아 혁명 이후 건설되고 있던 새로운 사회나 문명을 상징합니다. 시인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완성되는 모습은 볼 수 없음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3. 발레리 브류소프
러시아 상징주의를 정립한 발레리 브류소프는 지적이고 세련된 문체로 유명합니다. 초기에는 퇴폐적이고 유미주의적인 경향을 보였으나, 말년에는 과학, 역사, 그리고 사회적 변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시 또한 그의 철학적인 통찰과 시대 변화에 대한 시인의 시각이 잘 녹아 있는 작품입니다.
이 문구는 주로 브류소프의 초상화와 함께 인용되며, 다가올 미래에 대한 경외감과 지적 갈망을 상징하는 문장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