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프오, 그대와 나 둘만이 아니라서

발레리 야꼬블레비치 브류소프

by 김양훈

서글프오, 그대와 나 둘만이 아니라서

발레리 브류소프


서글프오, 그대와 나 둘만이 아니라서

하늘의 방문객 달이 창문으로

-우리를 훔쳐볼 테고,

도시의 굉음이 밤의 정적을 깨뜨려

마주한 두 눈 사이 어둠의 행복이

-망가뜨려질 테니.


서글프오, 내일이면 그대는 다른 이들과

끓어오르는 파도 속에 뒤섞여버릴 테고,

그들 속에, 그들과 함께 있으며,

아주 잠시라 해도 나를 잊을 테니…


오, 만약 내가 드높고 험준한 탑 위에

-홀로 있다면,

피처럼 붉은 등불 영원히 깜박이고,

내일이 곧 어제인 듯, 오로지 밤이 영원한 그곳,

어디에선가 물결이 끝없이 철썩대는 그곳에!


모든 이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우주로부터 떨구어진 채

우리 둘만 있다면, 나 그대의 것,

-그대 나만의 것으로!

그러면 우리 찰나의 영원을 지배하는

-황제와 같을 텐데,

해가 바뀌는 게 하루 같을 텐데. (1901)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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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 (17)


발레리 브류소프의 이 시는 세기말의 고독과 탐미주의적 열망이 농밀하게 녹아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시대적·문학적 배경과 함께 시평을 정리해 드립니다.

1. 작품의 배경

러시아 상징주의와 '데카당스'

이 시를 발표한 1901년은 러시아 문학사에서 상징주의(Symbolism)가 만개하던 시기입니다. 발레리 브류소프는 이 운동의 선구자이자 '교황'으로 불릴 만큼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은 급격한 근대화와 도시화 속에서 개인의 파편화된 내면에 집중했고, 현실 세계보다는 감각적이고 신비로운 '초월적 세계'를 갈망했습니다.

️도시의 침입과 고립의 갈망

이 시의 배경에는 20세기 초 급성장하던 대도시의 소음과 군중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시인이 느끼는 '서글픔'의 근원은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에 '타자(도시, 달, 다른 사람들)'가 개입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순수한 자아의 결합을 방해하는 현대 문명에 대한 거부감과 연결됩니다.


2. [시평]

찰나를 영원으로 박제하려는 탐미적 욕망

훔쳐보는 세계'로부터의 탈출

시의 전반부에서 시인은 '달'과 '도시의 굉음'을 불청객으로 규정합니다.

•달: 고전적 낭만주의에서 달은 축복의 대상이었으나, 브류소프에게 달은 우리의 내밀한 행복을 훔쳐보는 차가운 감시자입니다.

•도시: 정적을 깨뜨리는 물리적 소음이자, 내일이면 연인을 앗아갈 거대한 익명의 바다입니다.

시인은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즉 '폐쇄된 공간'에서만 완전한 사랑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탑'의 상징성과 고립의 미학

3연에 등장하는 '드높고 험준한 탑'은 매우 중요한 상징입니다. 이는 세상과 단절된 시인만의 성소(Sanctuary)입니다.

•붉은 등불: 생명력과 열정을 상징하는 동시에,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퇴폐적인 미를 드러냅니다.

•밤이 영원한 곳: '내일'이라는 시간이 오면 연인이 군중 속으로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기에, 시인은 시간이 멈춘 '영원한 밤'을 소망합니다. 이는 상징주의 특유의 반(反) 시간적 태도를 보여줍니다.

'찰나의 영원'을 다스리는 황제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우주로부터 떨구어진' 상태를 꿈꿉니다. 역설적이게도 세상으로부터 버려질 때 비로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온전한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찰나의 영원을 지배하는 황제"

이 구절은 이 시의 백미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 소멸할 수밖에 없는 '찰나'의 것이지만, 그 순간의 밀도를 무한히 높여 '영원'처럼 느끼게 하겠다는 의지입니다. 현실의 물리적 시간을 거부하고 심리적 시간을 지배하려는 예술가적 오만함과 절박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3. 총평

이 시는 연가(戀歌)를 넘어, 현대 사회 속에서 개인이 겪는 근원적인 불안을 다루고 있습니다. 타인과 섞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군중 속의 고독'을 예민하게 포착한 브류소프는, 그 해결책으로 외부 세계와의 완벽한 단절이라는 극단적인 낭만주의를 제시합니다.

서글픔으로 시작해 황제의 당당함으로 끝나는 이 시의 어조 변화는, 비록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사랑하는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을 아름답게 투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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