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화 속의 합창

원제 : The Choral

by 김양훈

니컬러스 하이트너(Nicholas Hytner) 감독과 작가 앨런 베넷(Alan Bennett)의 황금 콤비가 다시 뭉쳐 탄생시킨 <포화 속의 합창>(원제: The Choral, 2025)은 전쟁의 포연 속에서도 인간의 품격을 지켜내려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영화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의 영국 요크셔를 배경으로, 이 영화가 어떻게 '음악'을 통해 비극을 위로하는지 짧게 짚어보겠습니다.


포화 속의 합창
불협화음의 조화
​1. 하이트너와 베넷,
다시 만난 '인간애의 거장들'

​<조지 왕의 광기>, <히스토리 보이즈>를 통해 인간 본성과 시스템의 충돌을 날카롭고도 따뜻하게 그려냈던 하이트너와 베넷 콤비는 이번에도 탁월한 선택을 했다. 전쟁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전장의 참혹함을 직접 그리는 대신, 후방에 남겨진 사람들이 겪는 '전사 가족의 고통'과 그 빈자리를 메우려는 음악적 시도에 집중한다. 자칫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소재임에도 베넷 특유의 위트 있는 대사와 하이트너의 정갈한 연출은 영화를 지적 드라마로 격상시킨다.

​2. 랄프 파인스,
'엄격함' 속에 감춰진 '구원'의 미학

​영화의 중심축인 닥터 헨리 거스리(랄프 파인스 분)는 전형적인 '상처 입은 스승'의 초상을 보여준다. 독일 유학파 출신이자 무신론자, 그리고 당시로선 금기시되었던 정체성을 숨긴 채 합창단을 이끄는 그의 모습은 그 자체로 전쟁의 모순을 보여준다.

•​음악적 선택: 에드워드 엘가의 '게론티우스의 꿈(The Dream of Gerontius)'을 연습하는 과정은 단순히 합창을 맞추는 행위를 넘어, 죽음과 심판이라는 전쟁의 공포를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거스리의 필사적인 사투로 봐야 한다.

​3. '전장'이 아닌 '마을'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전쟁

​영화는 징집영장이 날아들 때마다 합창단원들이 한 명씩 줄어드는 현실을 냉정하게 포착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새롭게 충원된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는 더욱 단단해진다. "독일인의 음악은 연주하지 않겠다"는 편협한 민족주의와 "음악에는 국경이 없다"는 예술적 신념이 부딪히는 지점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갈등 구조와도 맞닿아 있다.

​ 포탄보다 강한 노래의 힘

​이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세상이 무너지고 있을 때, 고작 노래를 부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에 대해 <포화 속의 합창>은 명쾌하게 답한다. 음악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나 총알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붙잡아야 할 마지막 '인간성' 그 자체라고 말이다. 랄프 파인즈의 절제된 연기와 마지막 공연 장면에서 터져 나오는 합창은, 왜 우리가 이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도 계속해서 예술을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증명한다.


[註]

엘가의 ​'게론티우스의 꿈'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의 오라토리오로 잘 알려진 '게론티우스의 꿈(The Dream of Gerontius)'은 영국의 신학자이자 시인인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추기경의 시를 바탕으로 한 위대한 음악 작품입니다.​
이 곡은 한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고 그 영혼이 신의 심판대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1. 주요 배경 및 구성

​작곡 연도: 1900년

​원작: 존 헨리 뉴먼의 시 (1865년작)

​형식: 오라토리오 (독창, 합창, 관현악)

​구조: 총 2부로 구성


▪︎ ​제1부: 주인공 '게론티우스'가 임종을 맞이하는 침실에서의 상황.

▪︎ ​제2부: 육체를 떠난 영혼이 수호천사의 인도를 받아 연옥을 지나 신 앞에 서기까지의 과정.

2. 작품의 내용과 의미

​작품의 이름인 '게론티우스(Gerontius)'는 그리스어로 '노인'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즉, 특정 인물이라기보다 '죽음을 앞둔 모든 인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두려움과 평화: 제1부에서는 죽음 직전의 공포와 고통, 그리고 주변인들의 기도 속에서 평온을 찾으려는 인간의 심리가 세밀하게 묘사됩니다.

​신비로운 영적 여정: 제2부에서는 수호천사가 나타나 영혼을 인도하며, 천사들의 찬가와 악마들의 조롱 섞인 합창이 대비를 이룹니다. 특히 신의 얼굴을 마주하기 직전의 긴장감과 "지극히 높으신 분께 찬양(Praise to the Holiest in the height)"이라는 웅장한 합창이 백미로 꼽힙니다.

3. 음악적 특징

​바그너적 영향: 엘가는 이 곡에서 특정 인물이나 개념에 고유한 선율을 부여하는 유도동기(Leitmotif) 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는 당시 영국 교회 음악의 전통을 넘어선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습니다.

​합창의 힘: 단순히 배경에 머무는 합창이 아니라, 때로는 기도를 바치는 친구들로, 때로는 냉소적인 악마들로 변모하며 극적 입체감을 부여합니다.

4. 역사적 평가

​초연 당시에는 가톨릭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이유로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 측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곧 그 예술성을 인정받아 '메시아' 이후 가장 위대한 영국 오라토리오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곡은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정화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안식을 향해 나아가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랑을 받는 걸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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