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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Jan 28. 2024

살짝곰보의 꾸지람

2023년 5월 11일 한라일보 <김양훈의 한라시론>

덕구 덕구 이덕구 
박박 얽은 그 얼굴

한여름 대낮인데도 숲이 울창해 산길은 어두웠다. 베염이 지나간 듯 이어지는 꼬부랑길에는 도체비꽃이 만발했다. 안내원과 함께 한참 산길을 가다 물장오리 아래에서 진수내(川尾川) 줄기를 만났다. 두 사람은 물이 마른 냇바닥을 노루처럼 내달려 건너편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가쁜 숨을 돌리며 조릿대 덤불 앞을 바라보니 하얀 꽃길이 달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틀낭에서 떨어진 꽃눈깨비가 만들어 낸 조화였다. 4·3봉기가 시작된 지 석 달이 지난 7월 어느 날, 아지트에 은신한 이덕구 선생을 찾아가는 조천중학원의 김민주 학생의 발길은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허공에 떠 있었다. 이 묘사는 여섯 해 전 ‘이덕구 산전’을 찾아가며 느꼈던 풍경을 김민주 학생의 입산 모습인양 상상해 본 것이다.     

진수내를 건너는 이덕구 산전 답사팀, 2017년 6월 7일

교토의 리쓰메이칸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가 관동군 소좌로 해방을 맞고 귀향한 이덕구는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사회, 체육 과목을 가르쳤다. 살짝곰보 이덕구는 체구가 훤칠한 호남형이었다. 체육대회 때는 응원단장을 자임해 삼삼칠 박수를 이끌며 학생들과 어깨도 걸었다. ‘덕구 덕구 이덕구 박박 얽은 그 얼굴‘이란 노래가 학생들 사이에서 불렸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는 3·1사건 직후 경찰의 고문으로 고막이 터지는 상처를 입었다. 감옥을 나와 다시 교단에 섰지만, 곧 이어진 8·15 검거 선풍에 자취를 감추어야 했다. 마지막 수업시간에 육지로 떠난다고 말했지만, 그는 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교사와 학생들이 수시로 경찰서에 붙잡혀 가는 와중에 학생회장인 김용철 치사사건이 터졌다.   

   

여름옷을 걸치고 입산한 제자는 다섯 달 후에야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12월의 한라산은 모진 바람이 몰아치는 눈밭 세상이었다. “너는 집에서 가만히 공부하지 왜 이런 데 왔느냐”며 스승은 환영 대신 제자를 나무랐다. 걱정과 애정이 담긴 꾸지람이었다.


이듬해 6월 7일, 이덕구 사령관은 시안모루 지경 ‘북받친밭’에서 토벌대의 집중사격에 쓰러졌다. 부인과 다섯 살 아들 진우, 두 살배기 딸은 물론 친척들도 대부분 4·3 와중에 목숨을 잃었다. 아들 진우가 울며 살려달라고 하자 경찰관은 “아버지 있는 산으로 달아나라”고 하고는 산을 향해 뛰어가는 그를 쏘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살된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시신-제주4.3재단

십자가에 묶여 관덕정 광장에 전시된 이덕구의 시신은 때 절은 일본군 비행복에 입가에 피를 흘린 채였고, 그를 조롱하기 위해 웃옷 주머니에 수저를 꽂아 넣었다. 이후 경찰은  생포돼 조사받던 그의 부하들을 시켜 효수된 머리를 전봇대에 매달았다. 이 일이 끝나자 당국은 시신을 남수각 냇가에서 화장하였고, 유골은 다음 날 큰비가 내리는 바람에 바다로 떠내려갔다고 발표했다. 죽음에 대한 예의는 없었다.  

    

스승의 꾸중 때문이었을까. 제자는 하산한 후 일본으로 밀항해 오현중학교의 역사교사였던 김봉현과 함께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라는 책을 내었다. 누구라도 그러한 스승이라면 평생을 안고 살았으리라. 곧 스승의 날이다.         

산사람들이 사용했을 부서진 가마솥과 그릇들
산사람들이 활동했던 숲길, 2017년 6월 7일
이덕구 산전(山田)에서 술 한 잔 올리고 묵념을 했다.

4.3은 말한다. 발췌  
   조천중학원과 이덕구와 김민주
    
조천중학원 옛터


1권-3. 조천지서 5명에 실형 선고

여기서 잠시 조천중학원은 어떤 학교였는가를 살펴보겠다. 해방직후 제주도 내에서는 각 면마다 중학원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행정적인 지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역 유지와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군정 당국으로부터 아직 정식인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각 지역마다 중학원이 생기면서 교육 열기는 뜨겁게 일어났다. 조국이 해방된 마당에 먼저 교육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퍼져 나갔다. 학교운영비는 지역 유지들이 갹출해서 뒤를 댔으며, 교사들은 무보수로 근무하였다.     


조천중학원도 그런 학교 중의 하나였다. 1946년 봄에 문을 연 이 학교는 조천·함덕·신천·신흥 등지에서 학생들이 몰려 첫해엔 주간이 A클래스·B클래스 두 학급에다 야간 한 학급씩 편성되었는데, 결국 '4·3' 발발 직후 문을 닫을 때까지 5개 학급 2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게 되었다. 학생들의 연령층은 15세에서 2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며, 야간에는 국민학교 교사나 면사무소 직원들까지도 학생의 자격으로 강의를 받았다. 인쇄된 교과서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교재는 교사들이 매일 프린트해서 나눠주는 유인물을 사용했는데, 그 프린트물을 차곡차곡 모아 두면 나중엔 한 권의 교재 본이 되었다. 생존해 있는 조천중학원 출신들은 곧잘 "그때의 강의가 지금의 대학강의 못지않았다."라고 회고한다.     

교사들은 거의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던 유학생들로 해방 직후 귀향한 사람들이었다. 교사로 현복유(玄福裕, 국어), 김동환(金東煥, 영어), 김민학(金玟學, 수학·물리), 이덕구(역사·사회) 등이 근무했으며, 그 밖에 김석환, 김응환, 한평섭 등이 잠시 적을 두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바로 그 교사 가운데 나중에 이른바 게릴라 총사령관이 되는 이덕구가 끼어 있으므로 해서 이 학교 출신들이 이래저래 희생을 치르는 결과를 빚게 된다.  


입명관대(立命館大 리쓰메이칸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입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다 종전 후 귀향한 이덕구는 교사 시절에는 학생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이덕구는 글씨가 '닭발 글'이었고 수업할 때에는 침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강의는 열심히 했고 책을 읽을 때 한 줄 한 줄 읽지 말고 한꺼번에 두 줄씩, 또는 대각선으로 읽으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체육대회 때는 그 스스로 응원단장 노릇을 지원, 삼삼칠 박수를 유도하기도 했다. 얼굴이 얽어 학생들 사이에는 '덕구 덕구 이덕구 박박 얽은 그 얼굴'이란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조천중학원 강의 도중에 사상교육을 시킨 흔적은 없다. 다만 학교 내에 민애청 같은 조직이 있었고, 세포들이 당과 연계되어 삐라살포, 시위 등을 주도하였다. 이런 형태는 비단 조천중학원에만 었던 것이 아니며 그 무렵 도내 각지의 중학원, 일반 주민들의 생활 속에서도 보편적으로 퍼져 있던 분위기였다. 조천중학원 출신 한 증언자는 "지금에 와서는 좌익이다 우익이다 하는데, 그때의 상황에서는 그런 조직활동이 우리나라를 완전히 자주독립시키는 일이요, 그 길만이 정의의 길이란 생각을 하게 됐으며, 그것은 은밀한 생각이 아니고 학교나 마을에서 공공연히 이야기되던 분위기였다."라고 말했다.     


1946년 말부터 조천지서에 근무했던 한 경찰관은 육지 경찰이 들어오기 전에는 이덕구가 지서 순경들과 술자리를 같이하는 등 자주 어울렸다고 회고했다. 조천중학원이 자리 잡았던 곳은 일제시대 경방단사무실로 바로 조천지서 길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3·1사건' 직후 경찰에 붙잡혀 짧은 기간 옥살이를 하면서 고막파열의 상처를 입었던 이덕구는 다시 교단에 섰다가 1947년 8·15 검거 선풍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조천중학원 학생이었던 김민주 씨는 이덕구가 마지막 수업시간에 "'제군들, 열심히들 공부하라. 나는 육지로 가게 되어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다'라는 말을 남겼다."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가 육지로 간 것이 아니고 그 길로 입산의 길을 걷게 된 것은 '4·3' 발발 이후에야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덕구가 교단을 떠나고, 교사들과 학생들의 지서 연행이 잦아지던 와중에 터진 것이 바로 김용철 학생의 치사사건이었다. 제주 4·3연구소가 펴낸 4·3증언자료집 '이제사 말햄수다'에는 조천중학원 출신들의 증언채록이 엮어져 있다. 그 가운데 고문치사 당시의 분위기를 제주말로 묘사한 한 증언자의 말을 소개한다.   

  

"1947년이 되니 선생들을 막 잡아가. 어떤 선생은 수업하는 중에, 다른 선생은 밤중에 잡아가부는 거라. 우린 멋도 몰라서 학교에 가믄, 선생이 있어사 수업을 할 거 아니? 그때부터 학생들은 책보를 들고 지서로 줄줄이 몰려가는 거라. '우리 선생님 내놓으라'고, 돌멩이도 던지곡 했주. 그럴 때 학생회장하던 김용철이가 학교에서 잡혀간 죽은 거라. 요즘 말로 고문치사 당한 거주. 3일 동안을 전 학생허고 리민이 모연 이장으로 용철이를 묻고 난 다음부터는 모든 학생들이 과격해진 거라. 가만히 있다가는 안 되겠다고. 우리도 맞아 죽을 거 아니냐고……."    

숨진 김용철의 동생은 당시 아홉 살 난 소년이었다. 그는 형님의 장례식이 이장(里葬)으로 치러졌던 기억은 없고 "다만 여기저기서 장대에 달아맨 명정같이 생긴 '추도'가 많이 들어왔던 것은 사실이며, '추도'엔 뭔가 글자들이 쓰여 있었는데 그 내용은 알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어쨌든 조천지서 고문치사사건은 뒤이어 발생한 모슬포지서 고문치사사건, 그리고 금릉리 총살사건과 더불어 민심을 극도로 자극시킨 사건이었다. 일각에서는 '4·3' 발발을 부채질한 한 요인이 되었다고 해석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미군정 당국에서도 '4·3' 발발 이후 이 일련의 사건을 중시, 관련 경찰관들을 군정재판에 회부해 무거운 징역형을 언도하였다. 조천지서사건의 경우는 경찰관 5명 모두에게 징역 3∼5년의 실형을 선고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일보는 조천지서 고문치사사건의 군정재판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지난 3월 6일 제주도 조천지서에서는 구금 중이던 김용철(21)을 고문 치사케 한 사건이 발생하여 그간 그 귀추가 매우 주목되어 오던바 금반 중앙으로부터 '매로' 소좌가 내도하여 제주지방심리원에서 군정재판을 한 결과 지난 6일 재판장 '매로' 소좌는 지서장 이하 각 피고인에게 다음과 같이 언도를 내렸다.     

△경관 정대용(鄭大用)·정명옥(鄭明玉)·김천일(金天一)=징역 5년, 벌금 100만 원

△지서장 조한용·경관 백옥윤(白玉允)=징역 3년, 벌금 100만 원



2-김민주 관련 내용

'4·3'에 관한 저술 가운데 좌파시각의 대표적인 기록물이 1963년 일본에서 간행된 김봉현·김민주 공저의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이다. (공저자 김봉현은 오현중 역사교사 출신으로 1947년 제주민전 문화부장을 맡는 등 좌파활동을 하다가 '4·3'발발 직전에 도일했으며, 김민주는 1948년 조천중학원 학생의 몸으로 빨치산활동에 가담했던 경력이 있다.)     


이 책자에는 4월 3일 무장대가 행동을 개시하면서 뿌렸다는 2개의 '호소문'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삐라는 무장투쟁 지도부의 상징적인 구호로 간주, 여러 책자에 인용된 바 있다. 그중의 하나는 무장대가 공격대상으로 삼았던 경찰관·공무원·대청 단원들에게 보내는 경고문이다.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양심 있는 경찰원들이여! 항쟁을 원치 않거든 인민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공무원들이여! 하루빨리 선을 타서 소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직장을 지키며 약질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 양심적인 경찰원, 대청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조선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들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매국 배족노들을 거꾸러뜨려야 한다.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란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의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돌리지 말라. 양심적인 경찰원, 청년, 민주인사들이여! 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민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다른 하나는 무장지도부가 도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이다.     


"시민 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 '4·3' 오늘은 당신의 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 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이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겠습니다."  

   

이들 삐라는 대략 3가지로 요약되는 주장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첫째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저항하겠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곧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짧은 말에 함축되어 있다. 둘째는 단선 단정의 결사적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뜻이다. 당면한 5·10 단선 단정을 반대하는 통일운동으로서의 봉기의미를 내세우고 있다. 셋째는 미국의 전후 점령정책에 반기를 든 반미운동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낸 점이다. '반미구국 투쟁'이란 표현에서 시사하고 있듯 미군정에 저항하겠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이 같은 삐라의 슬로건은 앞서 뿌려졌던 삐라의 내용들, 즉 경찰과 서청의 횡포에 맞서 횡포에 맞서 싸우겠다는 도민적 울분의 토로에서 몇 걸음 나아가 단선 단정의 결사반대와 반미투쟁이라는 보다 정치적인 색채를 띤 지향점을 분명히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무장봉기의 지향점이 당시 5·10 선거를 통해서 38선 이남 지역 내에서 반공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미군정과 국내 단선지지파에게는 묵과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미군정과 경찰 수뇌부는 제주사태의 토벌 명분을 찾기 위해선지, 어떻게 해서든'제주폭동은 외부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어 문제에 접근해 갔다. 제주비상경비사령관의 자격으로 4월 5일 제주에 온 김정호 경무부 공안국장은 당시 사건의 윤곽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인데도 부임 첫마디에 "나는 이번 폭동사건은 제주도민의 주동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육지부에서 침입한 악질 불량도배들의 협박 위협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고 인정한다."고 밝힌 대목에서도 그 같은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심지어 김정호 사령관은 4월 28일 귀경, 서울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반도를 체포해다가 문초하여 보면 대개 백정들로, 좌익계열에서는 일부 잔학한 살인을 감행하기 위하여 남조선 각지로부터 백정을 모집해 제1선에서 경찰관과 그 가족, 선거위원 등을 살해하는 도구로 쓰는 형편"이라고 터무니없는 낭설을 유포하기도 하였다.     


단 군정장관마저 5월 5일 제주시찰 직후 "제주도 외에서 온 공산분자들이 일부 청년을 오도하여 산에 가서 폭동을 일으켜 관리와 선거를 지지하는 자들을 위협 살해하고 있다."라며 외지인들의 선동에 의해 폭동이 일어난 것 같은 발언을 하였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한술 더 떠서 예의 국제공산주의와의 연계론을 운운한 사실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제주 현지사정에 밝은 사람들은 당시에도 이 같은 외부와의 연계설을 부인, 대조를 나타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당시 경무부 공보실장의 직책까지 가졌던 김대봉이다. 김대봉은 제주감찰청장도 역임한 바 있는 제주 출신 고위경찰 간부인데, 그는 제주 현지 시찰을 마친 뒤 5월 5일 귀경해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폭동에 팔로군이 참가하였다느니 기관총을 가지고 있느니 하는 풍선이 있었으나, 그것은 전연 낭설이고 폭도들은 주로 제주도민이고 그 수효는 약 300∼400명으로 주축되고 있다."     


제주 출신 홍한표가 1948년 8월 초 「신천지」에 기고한 「동란의 제주도 이모저모」에서도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북조선이니 팔로군의 원조와 지휘를 받느니 하던 초기의 풍문은 허설이 되어가고 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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