뻬쩨르부르그의 시

by 오시프 예밀리예비치 만젤시땀

by 김양훈

뻬쩨르부르그의 시

-N. 구밀료프¹에게

오시프 만젤시땀

노란색 정부청사 위에

희뿌연 눈보라가 오래 맴돌았다.

법률가는 휘적이듯 외투를 여미고

또다시 썰매에 앉는다.

양지바른 곳에서 월동 중인 기선들.

선실의 두툼한 유리창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부두의 전함처럼 거인 같은

러시아가 육중하게 쉬고 있다.

네바 강가에는 세계 절반의 대사관들,

해군성, 태양, 정적!

제국의 거친 황복(皇服)은

고행자의 뻣뻣한 옷처럼 남루하다.


북방 멋쟁이의 마음의 짐은 무겁다―

그건 오네긴²의 고풍스러운 우수.

원로원 광장에는 눈더미 제방,

모닥불 연기와 총검의 냉기…


보트들은 물을 퍼내고, 갈매기들이

대마 창고로 날아들던 곳,

지금은 거기에 꿀물이나 흰 빵을 팔면서

허풍쟁이 행상인들만 어슬렁거리고 있다.

자동차 행렬이 안개 속으로 질주한다.

자존심 강하고 초라한 보행자―

괴짜 예브게니³는 가난을 부끄러워하고,

휘발유 향을 들이쉬며 운명을 저주한다. (1913)

[註]
1) 니꼴라이 구밀료프(Nikolai Gumilyov, 1886-1921). 아끄메이스뜨 그룹을 주도한 시인으로 만젤시땀의 친한 친구이자 안나 아흐마또바의 첫 남편이었다. 혁명 후 백군에 가담하여 볼셰비끼에 의해 처형당했다.
2) 뿌시낀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의 주인공.
3) 뿌시낀의 『청동 기마상』의 주인공.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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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40)


Saint Isaac's Square, St. Petersburg
창작 배경과 시평
러시아 시인 오시프 만델시땀(Osip Mandelstam)의 1913년 작, 「뻬쩨르부르그의 시( Petersburg Stanzas)」는 제정 러시아의 황혼기와 모더니즘의 태동이 교차하는 지점을 날카롭게 포착한 작품입니다. 이 시의 창작 배경과 시평을 정리해 드립니다.

1. 창작 배경: 제국의 황혼과 '아끄메이즘'의 탄생

① 시대적 배경 (1913년)

1913년은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 탄생 300주년이 되는 해로, 겉으로는 화려한 축제가 이어졌으나 속으로는 혁명의 기운과 제1차 세계대전의 전조가 감돌던 시기였습니다. 만델시땀은 거대하고 견고해 보이는 러시아 제국이 사실은 '남루한 옷'을 입은 고행자처럼 위태로운 상태임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② 문학적 배경: 아끄메이즘(Acmeism)

이 시는 만델시땀이 니꼴라이 구밀료프와 함께 '아끄메이즘' 운동을 주도하던 시기에 쓰였습니다. 모호하고 신비주의적인 상징주의에 반대하며, 사물의 구체성, 명료함, 그리고 역사적·건축적 무게감을 중시했던 이들의 철학이 이 시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시의 부제에 구밀료프의 이름이 명시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③ '뻬쩨르부르그 텍스트'의 계승

러시아 문학에는 푸시킨, 고골, 도스또예프스끼로 이어지는 '뻬쩨르부르그 신화(또는 텍스트)'가 존재합니다. 인공적으로 세워진 이 도시는 차갑고 관료적이며, 개인의 운명을 압살하는 비극적 장소로 묘사되곤 합니다. 만델시땀은 이 전통을 20세기 초의 감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Alexander Beggrov (1841-1914) The Bronze Horseman (36 by 24,5 cm)

2. 시평:

고전의 향수와 현대의 불안이 빚어낸 풍경화

① 건축적 시선으로 본 제국의 초상

시의 도입부에서 '노란색 정부청사'와 '양지바른 곳의 기선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시각적입니다. 만델시땀은 도시를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닌, 거대한 조각이나 건축물처럼 묘사합니다. 특히 러시아를 '부두의 전함처럼 거인 같은' 존재로 비유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표현한 대목은, 제국이 가진 압도적인 무게감과 동시에 정체된 에너지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② 푸시킨적 전통의 소환과 변주

이 시의 백미는 푸시킨의 인물들을 1913년의 거리로 불러낸 점입니다.

∎ 오네긴: 19세기의 귀족적 우수(ennui)를 상징하며, 북방의 차가운 정서적 배경을 형성합니다.

∎ 예브게니: 푸시킨의 서사시 『청동 기마상』에서 홍수에 연인을 잃고 광기에 빠져 황제의 동상에 대항했던 가난한 하급 관리입니다.

만델시땀은 20세기의 예브게니가 '휘발유 향'을 맡으며 '자동차 행렬' 사이에서 운명을 저주하게 만듭니다. 이는 과거의 비극이 현대의 자본주의적 소외와 결합하여 더욱 초라해졌음을 암시합니다.

③ 역설적 이미지: 황복(皇服)과 남루함

"제국의 거친 황복은

고행자의 뻣뻣한 옷처럼 남루하다."

이 구절은 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통찰입니다. 화려한 대사관과 해군성 건물이 즐비한 세계 절반의 중심지이지만, 그 내면은 고행자처럼 고독하고 결핍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제국의 외피와 그 안에서 신음하는 개인의 가난 사이의 괴리를 '남루한 황복'이라는 역설로 표현한 것입니다.

④ 감각의 전이: 냉기와 휘발유

시 전체에는 '차가움(눈보라, 총검의 냉기)'과 '현대적 악취(휘발유 향)'가 공존합니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뻬쩨르부르그라는 공간을 단순히 지도상의 위치가 아니라, 역사적 무게에 짓눌려 숨이 막히는 감각적인 공간으로 체험하게 합니다.

3. 총평

만델시땀의 「뻬쩨르부르그의 시」는 단순한 도시 예찬이나 비판이 아닙니다. 이 시는 문화적 기억의 저장소로서의 도시를 탐구합니다.

그는 푸시킨이 세워놓은 문학적 이정표(오네긴, 예브게니)를 따라 걷되, 그 끝에서 만난 것은 '자동차'와 '휘발유'로 상징되는 낯선 현대성이었습니다. 사라져가는 구체제의 장엄함과 다가올 혁명의 불안함 사이에서, 시인은 자존심 강하지만 초라한 보행자가 되어 도시의 공기를 기록했습니다.

"역사는 건축물처럼 단단하지만, 그 속의 인간은 먼지처럼 흔들린다"라는 아끄메이스트적 통찰이 완벽하게 구현된 시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St. Petersburg
in the early 20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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