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롭기만 하던 ‘웃드리’ 중산간 마을은 제주4·3 와중에 참혹한 비극의 땅으로 변했다. 1948년 11월 17일 제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중산간 마을 방화에 앞서 주민들에게 소개령(疏開令)을 내렸다. ‘중산간 마을 소개령’은 초토화 작전이었다. 다음 해 2월까지 근 4개월 동안 3만이 넘는 중산간의 초가는 거의 불타 없어지고, 2만이 넘는 마을 사람들은 알뜨르 해변 마을로 강제 이주 당했다. 그 와중에 많은 중산간 마을 사람들은 죄도 없이 목숨을 잃었다. 역사의 진보를 생각한다면, 오름을 오르고 웃드르의 들길을 걸으며 70년 전의 ‘참극’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옛날 흔히 쓰던 ‘웃드르’라는 말은 이제 거의 쓰지 않는다. 그 대신 국어사전에도 없는 ‘중산간 마을’이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김순자 박사가 쓴 책 ‘제주도방언의 어휘연구’에 자세한 설명이 실려 있다.
초토화작전을 앞두고 소개당하는 중산간 주민들
한편 김종두의 詩 <제주여인11>에서
그날의 아픔을 엿볼 수 있다.
중산간에 살았던 게
무슨 죄가 되었든고.
조상 땅 지키잰 호˚당 보난¹
위로도 못 붙으곡
알로도 못 붙엉
오도가도 못헌 죄
이게 죄가 되었고나.
죄지엉 죄인 되곡
죄인이난 죽어시믄
무슨 홀˚ 말 이시랴 마는²
영도³ 못 호˚곡
정도⁴ 못 호˚영 살았던
그 용허디 용헌 사름들⁵.
밤이 되믄
산에서 내려 왕 심엉 가곡
낮에는 알뜨르 벤촌⁶에서 올라왕
심엉 가곡⁷.
아,
屍身도 거두지 못혼˚
望夫의 恨이여.
[註]
(˚아래아<ㆍ>는 표기가 되지 않아 ‘ㅗ’로 대체하였다)
■호당 보난¹-하다 보니
■이시랴 마는²-있겠느냐 마는
■영도³-이렇게도
■정도⁴-저렇게도
■용허디 용헌 사름들⁵ 사름-순하고 순한 사람들
■알뜨르 벤촌⁶-아랫 들녁 해변마을
■심엉 가곡⁷-붙잡아 가고
마을 방화를 앞둔 소개령에 피신하는 중산간 아이들
□김순자 박사 著 ‘제주도방언의 어휘연구’
(p297~p299 - 중산간
‘중산간‘은 제주에서만 통용되는 용어다. 제주에서는 보통 표고 200~600m 사이의 지역을 ’중산간 지역‘이라고 부른다. 해안 변 지역과 한라산체와의 중간에 위치해 있는 지역이란 의미에서 붙여진 이 말은 학술적 용어는 아니며 편의상 통용되는 제주도적 용어이다. ’중산간‘이란 용어는 개발이 되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땅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동시에 외연적 토지 이용 개발 대상지를 지칭하는 용어로 중산간 지대라는 말을 쓰고(註·제주도 종합개발계획위원회-’濟州綜合10個年開發計畫草案’ 1970, p.93) 있어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중산간 지대·중산간 마을·중산간 도로·중산간 개발’ 등은 모두 그렇게 해서 탄생한 용어로 보인다. 그러나 이 용어는 국어사전에 올라있지 않다. 다만 일부 사전에 ‘중산간도로’가 등재되었을 뿐이다.
중산간이란 용어가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1960년대 이후로 보인다. 제주4·3사건 때 소개된 후 방치되었던 ‘웃드르’ 개발에 행정의 관심이 쏠리면서 부터다. 제주도는 1962년 김영관(金永寬) 도정이 ‘4·3사건의 이재민 복귀는 중산간 개발의 첩경’이란 슬로건을 내걸어 정착사업을 전개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당국에서는 이해에 버려진 중산간에 이재민 8백16세대, 4천1백 여명을 복귀시켰고, 국고보조와 美公法 480호에 의한 농경지 개간 사업도 착수했는데, 이때부터 비로소 중산간 개발이란 용어가 보편화 되었다.
‘중산간’이란 용어는 언제, 어떻게 생겼을까? 조선총독부가 1929년(소화 4)년 펴낸 ‘생활상태조사(生活狀態調査’(濟州島)를 보면, 토지 이용 지대를 삼림지대(한라산 총칭으로 밀림이 2리=약 800미터 이상 폭으로 된 곳), 산간지대(밀림 지역에서 중간 지대 이르는 2~3리 폭을 둘러싼 지역), 중간 지대(산간 지대와 해안 지대의 중간으로 한라산 기슭 1~2리 폭을 둘러싼 곳), 해안 지대(평지에 속하소 해안 일주도로 좌우 1리 내외 지역)로 나누고 있다. 이은상(李殷相)은 ‘탐라기행(耽羅紀行·1937)에서 경작 지대(200m 이하), 중간 지대(방목 지대·200m 이상), 산간 지대(300m이상), 삼림 지대(600m이상), 관목 지대(1400)로 나누고, 1943년 4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제주에서 생활한 석주명은 삼림지대(600mm 이상), 산간지대(300m 이상), 중간 지대(200m 이상), 해안 지대(200m 이하)로 구분하고 있다.
지금은 고도와 경사도에 따라 표고 200m 이하, 경사도 4° 이하의 매우 완만한 ‘해안 지대’, 표고 200~600m에 이르는 ‘중산간 지대’, 표고 600~1,200m에 이르고 10~20°의 다소 경사가 급한 사면을 이루고 있는 ‘산악 지대’, 표고 1,200m 이상이고 20° 이상의 급사면을 이루는 한라산 정상 부근의 ‘고산 지대’로 나누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적어도 1945년 이전까지는 ‘중산간’이란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고, ‘중산간’은 행정에서 편의상 부르던 용어가 오늘에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 또 토지 이용에 따라 단순하게 지대를 구분했던 것이 지금은 ‘중산간’ 일대가 각종 개발지로 부상하면서 토지 이용 개발을 위한 지정지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중산간’은 ‘중간지대’와 ‘산간지대’를 합쳐서 만든 조어(造語 )로써 독립적으로 완전한 용어가 아니다. 일반인들에게는 날 것 그대로 개발되지 않은 지역이란 의미로도 받아들여지지만, 행정에서는 대체로 ‘개발 용어’로 바꿔쓰고 있어 뚜렷한 개념 정립이 필요한 용어이다.
飛雪
제주4·3평화공원에 있는 조각상 <飛雪>
제9연대의 초토화작전이 한창이던 1949년 1월 6일이었다. 눈보라 치는 추운 한겨울, 중산간 마을인 봉개동에도 토벌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중산간 마을 사람들은 사냥개에 쫒기는 토끼들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쳐야 했다.
당시 25살 엄마였던 변병생도 두 살배기 딸을 품에 안고 거친오름 북동쪽 벌판에서 쫒기고 있었다. 멀리 가지도 못하고 모녀는 ‘빨갱이사냥’에 혈안이던 토벌대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어린 딸을 가슴에 꼭 껴안은 상태로 차디찬 눈바람 속에 두 생명은 피를 흘리며 얼어숨졌다. 얼마 지난 뒤 벌판을 지나던 행인이 하얀 눈 더미 속에서 모녀를 발견했다. ‘飛雪’이라 제목을 붙인 이 모녀상은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두 생명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