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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Nov 01. 2023

신축항쟁과 황제의 하수인들

2021. 12. 17. 한라일보 <김양훈의 한라시론>

1903년 1월, 홍종우가 제주 목사로 부임했다.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평리원 재판장과 비서원 승(丞)을 지내고 중추원 의관(議官)으로 있던 그였기에 누가 봐도 좌천이었다. 세 장두가 교수형을 받고 한성의 변두리인 청파 죄수묘지에 묻혀 불귀의 객이 된 지 한 해 반이 지난 때였다. 굶주린 까마귀들은 한겨울 칼바람을 타고 스산한 들판을 몰려다녔다. 인적이 드문 마을에는 세상모르는 아이들만 보리밭담 양지에서 신나게 연을 날리고 있었다.


농한기 어른들은 고시락불로 굴묵을 땐 온돌방에 끼리끼리 모여 화투를 치고 추렴도 하며 하루를 보내기 십상이었다. 시류에 밝은 김 서방이 성내를 다녀왔다며 신임 목사 이야기를 꺼냈는데, 개화당 김옥균을 암살한 바로 그 인물이라는 것이다. 풍문에는 어리고 가난한 비금도 시절, 한때 제주에 건너와 화전민 생활을 했다고도 했다. 사람들은 무지렁이라 자조하면서도, “이런 인물을 왜 이 시국에 내려 보냈을까?”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즈음 고종 황제에게는 프랑스 공사가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는 골치 아픈 신축년 난제가 두 개 있었다. 배상금 독촉과 천주교도의 집단 매장지 문제였다. 배상금은 이자가 새끼를 치며 금액이 나날이 불어나고 있었고, 신축항쟁 당시 이재호 목사가 프랑스 함대 함장에게 약속했던 매장지 처리는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첫째 배상금 문제는 석방조건으로 재수감되었던 채구석에게 해결자의 임무를 맡기면서 가닥을 잡았다. 채구석은 제주로 돌아오자마자 홍 목사와 함께 마을 유지와 주민들에게 징수금액을 분배하고 수금을 독려하였다. 삼군의 주민에게 걷은 총 6,315원의 배상금은 외부를 거쳐 프랑스 공사에게 전달되었다.


둘째 매장지 해결은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으로 당시 최고의 프랑스통이었던 홍종우에게 맡겼다. 그는 뮈텔 주교와 플랑시 공사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일제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기에, 황제의 홍종우 제주 목사 임명은 일석이조였다. 홍 목사는 부임하자마자 구마실 신부와 교섭을 시작했고, 프랑스 공사와 대한제국 정부는 그 내용을 토대로 사라봉 남쪽에 있는 황사평을 매장지로 결정하였다. 제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동군과 서군의 집결했던 민군의 성지를 천주교가 차지한 것이다.


궁핍한 황실의 금고를 채우기 위해 파견한 봉세관 강봉헌과 그의 마름 역할을 했던 천주교도들이 신축항쟁 서막의 악역이라면, 마지막 무대는 홍종우가 맡았다. 역할의 끝나자 공교롭게도 두 하수인의 행방은 묘연했고, 황제의 그림자도 지워졌다.


신축항쟁 120주년, 황사평에는 화해의 탑이 세워졌다. 이재수의 누이 이순옥 여사가 각고의 노력으로 대정 홍살문 거리에 세웠던 ‘대정군삼의사비’는 오래전 땅 속에 묻혔다. 그러나 비문의 글귀는 생생하다. “여기 세우는 비는 무릇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 가를 보여 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신축년 세밑은 권세 다툼으로 소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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