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민|4·3문학회 문집 특별기획 「제주4·3과 나」中
온 마을이 키운
잉글랜드산 박사, 독터 킴
무식하면 용감하다
2018년, 나는 영국의 킹스칼리지 런던에서 호기롭게 제주4·3을 연구 주제로 심리의학(psychological medicine) 박사 학위 과정을 시작했다. 흔히들 시작이 반이라는 얘기를 한다. 정말 시작을 하는 게 어려우니 시작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처음 제주4·3을 알았을 때 나는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고, 그것이 내가 제주4·3을 박사 학위 논문 주제로 고르게 된 이유였다. 최소 2만 5천명에서 3만 명이 사망한 이렇게 심각한 사안을 어떻게 모르고 자라도록 둘 수가 있나? 아니, 왜 이런 중요한 것을 가르치지 않았나? 이것은 국가가 나의 교육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 생각했다.
제주4·3평화공원의 전시관을 들러본 감상을 지도교수에게 토로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영문판을 이메일로 보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자국민이 이렇게까지 모르게 할 수도 있는 거냐며 경악을 금치 못한 심정을 얘기했다. 지도교수의 반응도 비슷했다. 그는 비록 영국인이지만 본래 역사를 전공했고, 특히 전쟁으로 인한 역사적 트라우마 등을 연구하는 연구자이기에 적지 않게 놀란 듯했다. 다른 국가의 일이라 해도 이 정도 규모의 사건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게 충격이라고 했다. 제주4·3을 연구해야 한다는 데 지도교수 또한 이견(異見)이 없었다.
그 후로 제주와 런던을 오가며 연구를 위한 준비를 했다. 4·3 유적지들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위령제와 추념식에도 참석하며 4·3과 나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 갔다. 제주4·3평화재단에서 보존해 둔 그간의 발간 자료들과 연구들을 살펴보며 사안의 심각성에 비해 연구가 정말 적다는 느낌이 들었다. 더군다나 내가 전공하고 있는 보건학적 접근의 연구는 거의 부재에 가까웠다.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에 관한 연구와 저서, 조사 자료, 박물관, 기념관, 영화와 같은 콘텐츠는 정말 그 종류와 양이 방대하다. 이제는 좀 더 본격적으로 국가폭력 생존자의 건강에 관한 연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영국에서 박사 과정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연구 계획서를 작성한 후 지도교수를 찾아야 한다. 사전에 지도교수를 찾고 연구 계획을 상의해 입학원서를 제출하면 면접을 통해 지도교수와 입학 담당자가 해당 연구가 해당 학교에서 지도 가능한지 아닌지를 심사한다. 그때만 해도 학교가 영국에 있고, 연구자가 한국에 있다는 게 큰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도교수는 항상 나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을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는데. 제주4·3 연구야말로 영국인들은 감히 하기 힘든 나만이 할 수 있는 연구라 생각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때는 몰랐던 것들이 많았기에 감히 박사 과정 연구 주체를 제주4·3으로 삼고자 했던 것 같다. 제주에 어떤 연고도 없었던 나에게 영국에서 제주4·3 연구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교 위원회를 설득하는 일이 첫 관문이었다. 영국의 대학들은 미국과는 달리 박사 과정 첫해가 끝날 즈음에 업그레이드라는 구술시험을 본다(필기시험을 보는 대학도 있기는 하다). 그때 내가 쓴 보고서와 함께 앞으로의 박사 과정 연구를 어떻게 할 것이라는 연구 계획을 설명해야 하는데, 위원회는 특히 제주에서의 데이터 수집 부분을 걱정했다. 때문에, 3년 안에 영국이 아닌 외국에서 혼자 이만한 연구를 해낼 수 있는지를 설득시켜야 했다.
연구에 기꺼이 참여하여 인터뷰해 줄 사람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는 제주4·3 당시 성인이었거나 막 성인이 된 사람을 연구 대상으로 했기에 특정 연령 이상의 대상자를 찾아내야 했다. 때문에 추천을 받는 일도 쉽지 않았는데, 당시 나이로 만 82세 이상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연구가 가장 시급한 연령층이기도 했다(아마도 내 연구가 거의 마지막으로 그분들과 인터뷰를 할 수 있었던 연구일지도 모르겠다). 설문 조사는 100명 이상, 면접 조사는 50명을 목표로 잡고 수행하기로 했다. 차근차근히 해 보자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고 도와줄 수도 없었다. 꼬박 열 달 정도를 채우고서야 인터뷰와 설문 조사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제주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경로당을 방문했다. 비가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안개가 끼나 변하지 않았다. 그 덕에 내 운전 실력도 대폭 늘었다. 그렇게 나의 험난한 제주4·3 모험과 고난이 시작되었다.
온 마을이 키운 박사 과정생
본래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잘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처음에 경로당을 방문해야 했을 때, 얼마나 문 앞에서 긴장하고 서성이다 들어갔던가. 하지만 종래에는 운전을 하다 경로당이 보이기만 하면 들어가 노인회장님을 찾아뵙고 인사부터 했다. 지금도 내가 내성적이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마을마다 경로당의 분위기도 매우 달랐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곳들이 있다. 인터뷰를 위해서는 주로 오전에 찾아뵙고 경로당 한구석에서 인터뷰를 시도하거나 댁으로 찾아뵈었다. 그러다 보면 으레 점심시간 즈음 인터뷰가 끝이 났는데, 그때마다 대부분의 삼춘¹들은 밥을 먹고 가라 권했다.
한국인은 밥심이지. 거절도 예의가 아니라 식탁 한 귀퉁이에서 밥을 얻어먹곤 했다. 그렇게 붙은 별명이 ‘온 마을이 키운 박사 과정생’이었다.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다. 박사 과정생 역시 마찬가지여서 나는 여기저기서 밥도 많이 얻어먹고 챙김도 많이 받았다. 서역만리(西域萬里)에서 공부하느라 고생한다, 밥은 먹고 다니냐, 밥은 챙겨 먹고 해야지 등등, 유독 끼니를 챙기라는 말씀을 많이 해 주셨다. 그날도 식탁 한 귀퉁이에서 밥을 얻어먹는데, 삼춘 한 분이 나를 가리키며 누구냐 물었다.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누군지가 무슨 상관이냐, 배 안 곯는 게 중요하지”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의미가 함축된 한마디였다. 누군지 몰라도 살아오신 삶이 어떠했을지 감히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기에 더욱 무겁게 내려앉게 하는 말씀이었다.
삼춘들의 걱정은 밥걱정에서만 멈춘 것은 아니었다. 어느 경로당에서 다 함께 모여 계실 때 연구설명문을 나눠 드리며 어떠한 연구이고 어떠한 질문을 하려 한다는 것을 설명해 드릴 때였다. 한 삼춘께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조심스럽게 나에게 물었다. “4·3을 국가폭력이라고 불러도 되냐?” 순간적으로 나도 할 말을 잃었다. 삼춘께서는 재차 물었다. “너 어디 끌려가는 거 아니냐? 진짜 괜찮냐?” 옆에 계시던 다른 삼춘이 요즘은 세상이 변해 국가폭력이라고도 한다며 괜찮다 하셨지만, 정말 괜찮은 게 맞냐는 두려움과 진짜로 세상이 바뀌긴 했나 보다 하는 신기함이 혼재해 있는 그 삼춘의 표정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하지만 모든 마을에서 걱정과 격려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똑같은 연구설명문을 가지고 똑같은 설명을 했는데 크게 혼나고 내쫓겼던 적도 있었다. 어떻게 국가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냐며 굉장한 노여움을 마주한 적도 있었다. 아마도 경찰 유족일지도 모르겠다는 얘기를 후에 들었는데, 가끔이지만 싫은 소리를 들으며 내쫓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분노의 맥락을 알아도 그건 그거였고 폭언은 폭언이었다. 나는 그때 어리고 경험도 적어서 언어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면 눈물이 찔끔 나기도 했고 서러움에 길바닥에서 대성통곡하기도 했다.
제주4·3을 연구하기로 한 결정을 후회한 적은 없지만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다며, 미리 경고해 주지 않은 실체 없는 누군가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아무도 하라고 시킨 사람이 없으니 원망의 대상은 나 자신이었다. 알았더라면 4·3 연구를 안 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한다면, 그건 또 아니라고 대답했겠지만 어쨌든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인터뷰 내내 울음을 참는 일도 쉽지 않았다. 내가 연구를 하기 전 단 한 가지 다짐이 있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절대 연구 참여자 앞에서 울지 말자는 것이었는데, 다짐을 지키기는 했으나 위태로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하나 서럽지 않은 경험을 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하지만 제주4·3 공부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대성통곡했던 날이 있었다. 아마 70주년 추념식 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평화공원의 위령 제단 앞에 굿판이 차려졌고 일주일에 걸쳐 해원상생굿을 했다. 굿판 제사상에 올릴 것들을 할망²들이 챙겨 오시기도 했다. 난생처음 가까이에서 보는 굿판이었기에 신기한 마음에 아침부터 여기저기 구석구석 다니며 구경했다. 마을 분들이 함께 오셔서 심방이 그 이름을 부를 때까지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안내 책자만을 들여다보고 계셨다. 심방이 익숙한 이름을 읊기 시작한다며 주변 할망들끼리 조용히 하라며 주의를 모우기도 하셨다. 그 이름 한 번 불리는 것을 그렇게도 애타게 기다릴 수가 있나, 찰나의 순간에 불리는 그 이름을 제대로 들으려 하던 이야기도 멈추고 집중하는 그 모습에서부터 이미 내 눈물주머니는 차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장면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컥한다.
그런데도 기어이 내 눈물주머니를 터트린 할망은 따로 있었다. 기자들 틈바구니에서 국판 이모저모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지팡이를 짚은 채, 한껏 흰 허리 위로 상자를 끈으로 묶어 위태롭게 들쳐업고 오는 할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은 기자들에게도 인상적이었는지 다들 카메라를 그쪽으로 들이댔다. 할망은 제사상 앞에 쭈그리고 앉아 가져오신 상자를 열었다. 배추 상자였는데 안에 든 것은 찐빵처럼 생긴 것이었다. 처음에는 찐빵인 줄 알았는데 후에 검색해 본 결과 상애떡³이었을 거리는 생각이 들었다. 삼춘을 향한 플래시 세례에 삼춘은 상자를 풀다 겸연쩍으신 듯 허허 웃으셨다.
호텔에 돌아와 씻지도 못하고 침대 위로 엎어졌다. 자꾸만 그 삼춘의 느릿한 걸음걸이가, 한껏 굽었던 허리가, 상자 앞에 쪼그려 앉은 작은 몸이, 상자를 풀어내던 뭉툭한 손길이 머릿속에 반복되었다. 지나오셨을 인생이 멋대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제주4·3 연구를 하며 익혔던 그 시기의 생활과 분위기 같은 것들이, 그 시절을 살아보지도 목격한 적도 없으면서 감히 한 사람에게 투영하여 상상되었다. 마치 소설을 읽고 머릿속에 파노라마가 펼쳐지듯이, 여기저기에서 읽고 익혔던 그 삶들을 한데 모아두어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인 듯한 그런 기분이었던 건지, 마치 그 영혼이 내 몸에 들어온 듯 그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어찌나 펑펑 울었던지, 성인이 된 이후로는 그렇게 소리 내어 엉엉 울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왜 우는지도 모른 채 엉엉 울었다. 옷에서 향냄새가 나는 듯했다.
제주 삼춘들은 나를 먹여 키우기도 했지만, 연구자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감수성 또한 길러 주었다.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끼며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내가 질적 연구를 박사 과정 연구 방법론으로 선택한 이유도 비슷했다. 그 때문에 만약 누군가 또 나와 비슷한 공부를 하고 싶다면 다른 건 몰라도 꼭 위령제나 추념식은 반드시 참석해 하루종일 있어 보라 권하고 싶다.
귤은 얻어먹는 파치⁴가 제일 맛있다
(…)
어쨌든 언젠가 끝맺음은 온다.
처음 연구를 시작할 때에는 너무 무섭기도 했다. 무식하니 용감했기에 시작은 했으나 하나씩 하나씩 무언가를 알아 갈수록 이걸 내가 해도 되는 게 맞나 하는 끝없는 자기성찰의 굴레에 빠졌다. 물론 자기성찰은 박사 과정의 당연한 수순이고 목적이니 문제가 될 것은 없었지만 한창 연구하는 와중에는 그게 쉽지가 않았다. 끝없는 자신에 대한 의심은 나를 포함한 주변 박사 과정생들 모두가 겪는 과정이다. 나의 주된 성찰 중 하나는 혹시라도 내 연구가 오랜 제주4·3의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의 과정에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뭘 잘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지금 생각하면 사실은 별로 실체 없는 걱정이었지만 배우는 학생의 입장이었으니 두려웠을 만도 했다. 그래서 박사 과정은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할 수밖에 없는 과정인가 싶었다.
(…)
이렇게 차근차근 연구수행 훈련을 받고 공부하며 실제 데이터 수집을 통해 익힌 감각으로 어찌어찌 일 년 가까이 제주에 머물며 많은 이야기를 듣고 다녔다. 지지부진할 듯했던 연구 참여자 모집도 어찌어찌 다 해내었다. 매일 밤 누군가에 쫓기는 듯한 꿈을 꾸며 수집한 자료들을 분석했고 논문도 써냈고 학위도 받았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고통이 그래도 끝을 맺었고, 박사 과정을 시작할 때 느꼈던 실체 없던 두려움도 어쨌든 나는 시작했고 끝을 맺었다는 생각에 삼춘들이 가꾼 귤나무에 대한 자부심처럼 어느 정도 자신감으로 탈바꿈되는 듯했다.
눈물 나지 않는 사연 하나 없었다. 하지만 끔찍했던 시절을 겪어도 삼춘들은 두 발 딛고 제주 땅 위에서 다시 살았다. 사람은 마냥 약하지만은 않아서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역경을 극복하는 힘, 트라우마를 겪기 이전의 마음 상태로 되돌리려는 회복의 힘을 회복 탄력성 또는 리질리언스(resilience)라고 부른다.
제주의 삼춘들이 보여준 리질리언스는 정말 강력하여 나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내가 아무리 힘든 시기를 겪고 마음고생을 하더라도 이것이 이 삶의 끝이 아니라는, 이 힘듦은 언젠가는 끝이 나고 삶은 이어진다는 그런 영감을 주었다. 이보다 더한 경험을 하고도 삶을 살아 낸 사람들을 눈앞에서 보고 그 목소리로 트라우마의 경험과 삶의 의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나로서는 내가 겪고 지나고 있는 이 힘듦이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만한 것이 아니라는, 삼춘들이 그러셨던 것처럼 나도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만났던 4·3은 속절없는 고통 속 삶의 끈기였다. 나에겐 성찰의 순간들이었으며 성장의 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실 겪지 않았어야 하는, 겪어서는 안 되는 고통이었다. 제주4·3과 같은 국가폭력이 없었더라면 삼춘들이 저마다의 고통을 견뎌 내었던 삶의 끈기는 다른 방향으로 더욱 찬란하게 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사람의 생애에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과 기회를 송두리째 앗아간 것,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피눈물 나게 만든 것은 죽어서도 갚지 못할 원죄임에 또다시 나로 하여금 자기성찰을 하게 한다. 많이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 마음 다치게 하는 일은 하지 말자, 피눈물 뽑을 일은 하지 말자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을 다쳤을 때 얼마나 힘든 시기를 지나야 하는지 아는 이는 다른 이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제주 삼춘들로부터 배웠다.
-4·3문학회 문집 특별기획 「제주4·3과 나」 (김지민|<온 마을이 키운 잉글랜드산 박사, 독터 킴>) 中 발췌.
*김지민은 한라산과 온 마을이 키운 영국 박사. 제주에는 전혀 연고가 없었지만 제주4·3 연구를 위해 1년 가까이 제주에 살았다. 「제주투데이」에 ‘지민 in 런던’ 칼럼을 연재했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의 국제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이화여자대학교 신산업융합대학 건강과학융합연구소 연구원으로 건강 연구와 정신 보건을 강의하고 있다.
[옮긴이 註]
1) 제주에서 '삼춘'이란 표현은 남녀를 불문하고 먼 친척 어른은 물론 이웃의 윗사람을 정감있게 부르는 단어이다.
2) 할망 : 할머니의 제주어
3) 상애떡 : 제주도 지방의 향토음식인데, 예전의 상화병(霜花餠)과 같은 형태이다. 상화는 밀가루를 술로 반죽하여 발효시켜 채소나 팥소를 넣고 둥글게 빚어 찐 떡으로, 고려시대 원나라에서 전래된 음식이다.
상화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조리서인 『음식지미방』에 그 제법이 기록되어 있으나, 그 뒤의 조리서에는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상화의 조리법은 상애떡이라는 명칭으로 제주도에 정착하여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에서는 삭망이나 제사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상애떡을 만들어 대바구니에 담아서 선사하는 풍습이 있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
4) 파치(破치) : 깨어지거나 흠이 나서 못 쓰게 된 물건. 제주에서는 흠이 있거나, 또는 크기가 너무 크거나 작아서 상품성이 없는 귤을 ‘파치’라 부른다.
4·3문학회는, 문학을 통해 제주4·3의 진실을 찾아가는 서울 지역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은 2017년 4월 재경제주4·3희생자유족청년회 회원들이 주축이 된 『화산도』 읽기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2021년부터는 4·3관련 자료와 작품 전반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으로 확장하고. 이름을 ‘4·3문학회’로 바꿨다. 월 1회 정기모임을 8년째 이어 가고 있다. 현재 회원은 30여 명이고 회장은 양경인, 좌장은 김정주가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