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청년’에 뿌리 둔 한국 개신교의 주류
[書評] 한국전쟁과 기독교
‘서북청년’에 뿌리 둔 한국 개신교의 주류
허미경 선임기자 carmen@hani.co.kr
<한겨레신문> 2015년 11월 26
한경직 목사 영락교회와 함께
한국전쟁·박정희집권기 세확장
사회 주류 포진 ‘보수’의 핵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어떤 이들에겐 ‘악몽’처럼 등장하는 이름. 흔히 서북청년, 서북청년단으로도 불리는 서북청년회(서청)는 해방 뒤 1946년 말 서울 종로에서 결성됐다. 사회주의 소군정이 들어선 북한에서 이른바 반동분자로 찍혀 탄압받았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생존하기 어려워 월남한 서북지역 출신들로 이뤄졌다. 황해도 이북과 평안·함경도 지역 출신들이 각기 활동하다 더 강한 세력이 되고자 기존 조직을 해체·통합한 것이다.
서북청년들의 ‘활약상’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1946년 대구봉기(10월항쟁)와 1948~54년 제주4·3항쟁의 진압이다. 서청에 대한 기존 연구는 2000년대 초까지 민간인 학살의 주역으로, 그 잔혹한 폭력의 동기에 대한 조사와 분석이 주로 이뤄졌다. 그들은 그뒤 아마도 한국인 다수의 기억과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한국전쟁과 기독교>는 “학살 피해의 패러다임을 넘어” 서북청년을 보는 시야를 넓히는 책이다. 그들 월남한 서북청년들의 뿌리를 추적하고, 그들이 신사상(기독교)을 젖줄 삼아 ‘전투적 반공주의’로 무장한 채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라는 공간과 5·16쿠데타를 발판으로 하여 어떻게 남한 사회의 주류로 발돋움했는지를 다룬 역작이다. 역사학자 윤정란(케임브리지대 한국전쟁연구사업단 연구원)이 5년여에 걸친 연구·집필로 완성했다. 아이러니한 언사로 표현하자면 19세기 말 한반도 서북 지역에서 태동한 한 개신교 세력의 20세기 ‘성장담’이라 할 것이다.
왜 서북 지역인가. 그곳은 조선 내내 정치·사회적으로 소외됐다. 19세기 말 그곳에서 성장한 신흥 상공인층과 지주들은 새 사회를 꿈꾸며 이른바 근대 자본주의문명의 첨병으로 기독교를 누구보다도 빠르게 수용했다. 이 지역 지식층은 평양·단군으로 상징되는 역사를 민족사의 주류로 파악하며 구한말과 일제 시기 기독교 민족운동을 주도했다. 이렇게 맞은 해방공간, 북한 체제의 토지개혁과 사유재산권 부정은 그들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었다. 해방 뒤 사회주의자들과 대립하다 월남한 사람 대부분이 기독교인인 까닭이다.
서북청년들의 연원을 좇는 이 책에서 주요 등장인물은 한기총 초대 회장이자 한국 개신교계의 존경받는 원로로 일컬어지는, 영락교회 설립자 한경직(1902~2000) 목사다. 월남한 서북 개신교인들은 오산학교 출신으로 서북에서 기독교사회민주당을 만들기도 했던 한경직을 중심으로 속속 결집했고 영락교회는 “월남자들의 신앙 공동체이자 반공의 전투기지”로 구실했다. 영락교회 학생회·청년회가 서청의 중심이었을 만큼 이 교회 자체가 서청 탄생에 깊이 연루돼 있다.
한경직 목사는 80년대 초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서청은 해방공간과 한국전쟁기 목숨 걸고 이른바 ‘좌익 척결’의 선봉에 섰다. 미군정의 국립대학설립안에 수많은 교수·학생이 반대운동을 벌이자 서청은 그 핵심을 좌파라 단정짓고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6,000여명의 회원을 경성대학을 비롯한 각 학교에 편입학시켰”으며, 경성방직·동양방직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파괴에 전위로 나선 것도 서청이었다.
한국전쟁은 서북 개신교인들에게 기회의 공간으로 작용했다. 그 중심도 한경직이었다. 그는 남한 개신교 장로회에서 신사참배 거부그룹과 조선신학원그룹을 밀어내고 주도권을 잡았다. 그 힘은 “미국에서 들어오던 방대한 전쟁 구호물자와 선교자금의 독점”에 있었다. 서북 출신인 그는 전쟁 전 서북지역을 관할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과의 밀착 관계를 활용했다.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 통역을 전담할 수 있었던 덕이다.
이승만 정권기 한때 정치적으로 배제됐던 서북 출신들은 5·16쿠데타와 함께 화려하게 부활한다. 서청 회원들은 한국전쟁기 조선경비대(국군)와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에 대거 들어갔다. 47년 입교한 육사 5기생 중 서북 출신이 3분의 2였고, 48년 입교한 8기에도 서북 출신이 많았다. 5기와 8기의 서북 출신 장성들은 “1961년 군사 정변의 주역”이다.
그 28년 뒤인 1989년 6월 한 신문 기사는 흥미로운 유행어를 소개했다. “비행기를 타려면 티케이(TK) 노스웨스트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을 타라.” 그 기사는 저 말의 배경을 이렇게 썼다. “요직을 과점한 대구·경북 세에다 국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신원로 그룹들 상당수가 이북 출신들(국회의장, 국무총리, 대통령비서실장)임을 빗댄 것으로, 노스웨스트는 과거 서북청년단에서 유래한다.” 오늘날 대형교회의 상당수가 서북 개신교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다. 이들의 성장과 영향력 확대는 한국 사회를 더 오른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들은 이명박 정부에서도 소망교회란 이름으로 재등장했다. 소망교회는 서북 출신 목사 곽선희가 세웠다.
<한국전쟁과 기독교>는 한국 개신교 주류의 뿌리를 톺은 책이다. 그 뿌리라 할 서청이 가담한 일 중에서 4·3 진압의 희생자는 수만 명에 이른다. 그에 대한 정부의 사과는 있었으되 민간 차원의 사과는 아직 없다. 한국 개신교계는 과거 서청의 이름으로 행한 일을 일각에서나마 사과해야 하는 것 아닌지?
[인터뷰] 윤정란 박사,
공백의 한국 근현대 기독교사를 연구하는 역사인
김유수 기자 2019년 6월 21일 <가스펠투데이> http://www.gospeltoday.co.kr
‘한국전쟁과 기독교’ 집필
“한국 기독교사(基督敎史) 없이는
한국 현대사 입체적인 이해불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빛났던 기독교의 역할이 특히나 주목받는 한 해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기독교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끊임없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의 한국기독교 역사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굉장히 부족했던 것이 현실이다.
윤정란 박사(서강대 종교연구소 연구원)는 ‘일제시대 한국기독교 여성운동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한국 근현대사에서의 여성, 항일운동, 한국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요소들을 연구해왔다. 그리고 이북출신 기독교인들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남한에 자리 잡으면서 파생시킨 역사적 과정들을 연구한 저서 '한국전쟁과 기독교'를 펴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한국전쟁에 대한 역사적 관심이 집중되는 이때, 한국 근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한국기독교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윤정란 박사를 만났다.
한국 기독교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한국 근현대사를 결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어
Q 기독교 한국사에 관심 갖게 된 계기가 있다면?
사학과에 진학하여 역사를 공부하다가 박사 과정 때부터 한국기독교가 한국 근현대사와 큰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 독립을 준비하는 한쪽 노선은 사회주의자들이 국제주의를 강조했고, 다른 노선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민족을 강조했는데 민족의 독립을 위해 민족주의자 연대를 주도했던 사람들이 다름 아닌 기독교인이었다. 이처럼 한국기독교가 근현대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한국 기독교사에 큰 관심을 갖게 됐다.
내가 2015년에 쓴 ‘한국전쟁과 기독교’라는 책이 유명해졌다. 일제강점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많은 지식인은 근대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이 민족주의 운동으로 연결됐는데 광복 이후에 민족주의 기독교인들이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졌다. 근현대사의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광복 후 어디로 갔는지, 오늘날의 태극기 부대까지 연결이 되는 기독교 반공주의가 어떻게 등장하게 됐는지가 궁금해서 광복 이후 기독교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전쟁과 기독교’라는 책을 쓰기로 결심하게 됐다. 책을 쓰면서 특히나 그 시기 사회에서 자발적이고 역동적으로 일했던 사람들을 추적하는 데 집중했다.
사실 나도 처음엔 기독교 여성학과 기독교 사회주의를 연구하려다가 결국 기독교와 역사를 주로 연구하게 됐다. 한국기독교가 한국 근현대사에서 큰 영향력을 끼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제대로 된 학계의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하지만, 한국 기독교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한국 근현대사를 결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Q 근대화 시기 한국기독교의 양상은 어땠나?
일제강점기 당시 남쪽도 도시지역엔 기독교가 성장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농촌 지역에는 천도교와 불교가 강세였다. 농촌이 많았던 남쪽에서는 기존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지주들이 지역을 꽉 잡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종교가 자리 잡기 힘들었다. 또한. 교회를 다녔던 소작인들도 교회에 헌금을 낼만큼의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에 일제강점기 당시 남쪽의 교회 성장이 더뎠다.
반면 이북지역에는 일본이 공장과 철도를 들여놓아 상업과 무역이 활발해졌다. 근대 상업과 공업 인프라가 자리 잡은 이북지역에는 상업과 무역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고 이들이 활발하게 기독교에 참여했다. 이북 주민들은 남쪽에 비해 자유롭게 교회에 출석했고, 상공업 노동을 통해 번 돈을 교회에 헌금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한국기독교는 북한에서 먼저 부흥하게 됐다.
Q 한국전쟁사에서 기독교의 의미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작성한 2018 종교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는 기독교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전에 남한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고 신도 수가 많았던 종교는 불교였다. 이렇게 한국기독교가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을 나는 한국전쟁이라고 본다.
한국전쟁 이전에도 기독교가 한반도에서 확산하는 과정에는 항상 전쟁이 관련 있었다. 청일전쟁 때 평양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주변 지역으로 피난을 가면서 기독교가 부흥했고, 러일전쟁 때는 의주 쪽에서 같은 과정이 일어났다. 한국전쟁 때 종교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평안도 황해도 사람들이 남한으로 대거 내려오면서 한국기독교 발전을 이끌었다.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남쪽에서 시장 활동에 참여했다. 이에 상설시장이 활성화됐고, 전쟁 이후는 월남한 사람들이 시장을 장악하게 된다. 부산의 국제시장같이 대구 및 경상도 지역에 시장이 활발하게 늘어났고 3일장, 5일장이 열리던 지역에도 피난민들에 의해 상설시장이 생성되게 된다. 이러한 이북출신 피난민들은 지역에 교회를 만들고 성장시켰다. 한국전쟁 이전에 부산에는 9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51년에 100개의 교회가 신축됐다. 이러한 교회는 지역에 예배당뿐만 아니라 복지원과 고아원, 학교를 지어 지역사회에서 중요한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Q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신앙인들에게 바라는 역사의식이 있다면?
내가 강조하고 싶은 자세는 모든 것을 본인이 직접 정확히 알아보고 찾아본 뒤에 판단하는 자세다. 이는 신앙인에게든 신앙인이 아니든 똑같다. 사실 기독교 역사에 관해 신앙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좋은 이야기들은 얼마든지 많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는 종교 지도자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주목받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중요한 가치인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모습도 많이 보인다. 물론 이는 모든 한국 기독교인들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 현대 시민사회를 살아가는 한국의 교인들이 평소에 명확한 기준과 의식으로 판단하며, 이를 통해 명확하게 말하고 행동한다면 앞에서 이끄는 종교 지도자들의 자세도 분명히 바뀔 것이라고 생각한다.
Q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이제 한국전쟁 이후 60, 70년대 근대화 과정과 한국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연구할 계획이다. 한국전쟁 이후 근현대사에서도 기독교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다. 그런데 학계의 한국 근대화 연구에 있어서 ‘일본에서 경험한 노동운동과 근대화’, ‘한국의 근대화론이 자발적인가 식민지적인가’ 등의 일본과 관련된 논의는 많았으나 기독교와 관련된 논의를 연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60, 70년대 경제 성장의 배경과 한국 기독교인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하려고 한다. 특히 그 시대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세계교회와 연대를 하면서 한국의 민족운동과 경제 성장에 영향을 줘왔는지를 연구할 계획이다.